『광기와 우연의 역사』

by 새벽

(슈테판 츠바이크, 1927)


“예술과 삶에서도 그렇듯이, 역사의 장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숭고한 순간이란 드문 법이다. 대개 역사는 수천 년을 잇는 저 거대한 줄을 덤덤하고 우직하게 한 올 한 올 짜나가면서 연대기 기록자처럼 사실에 사실을 나열하곤 한다. (...) 천재가 하나 나오려면 한 민족 안에서 수많은 범인이 태어나야 하듯이,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 별의 순간이 오려면 억겁의 시간이 태평히 흘러가게 마련이다.”(4-5)


“역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짓는다. 이런 경우에는 모든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몰리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지극히 짧은 구간의 시간에 몰린다. 보통은 느긋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어나던 것들이 단 한순간 안에 응축되는 경우, 이 순간은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짓는다.”(5)


“여러 시대와 다채로운 영역에서 추려낸 몇 개의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 (...) 이러한 순간들이 부질없이 지나간 세월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5)


참 유명한 title이지만 이제야 읽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


14개 ‘별의 순간’으로 구성된 흡인력 높은 역사 에세이다. ‘인류 역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은 대개 광기와 우연으로 인해 결정됐다’는 저자의 주장에 걸맞은 주요 순간들을 그리고 있다.


예견되고 치밀하게 계획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시기 특정인의 광기와 우연적인 행운? 혹은 불운이 겹치며 인류 역사를 바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키케로의 에피소드.

그는 평생 정의롭지 않은 소송을 담당하던 법률가였지만 말년에는 숭고한 이념을 위해 헌신하는 변호사로 변모해 유유히 죽음을 맞이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를 를 살해한 자들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몸에 단도 5인치 깊이로 찔러 넣을 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몹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키케로는 블루투스 일당과 민중이 단호히 행동에 나서도록 충고하고 부추기는 선동하는 연설을 하지만,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실수를 저지른다.”(20)


“사색하는 인간은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리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행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역사에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21)


“로마 문화권에서 최초로 이 무력한 사람은 인간성을 옹호하면서 인간의 공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최고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제껏 세련된 휴머니스트에 불과했던 키케로는 죽기 직전에 휴머니티를 처음으로 옹호하는 사람이자 참된 정신문화의 대변인이 된다.” (26)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는 이 연단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잔인한 무법자들을 고발하는 명연설을 했지만, (참수되 걸린 머리에서) 고인의 핏기 없는 입술은 그 어떤 연설보다도 더 통렬히 폭력이 저지른 불의를 민중에게 고발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당대의 지도자가 그를 모욕하려고 궁리해 낸 일로 키케로는 영원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39)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그는 산 너머로 수백 척의 배를 운반하는 기상천외하고 대담한 발상으로 동로마 제국을 향한다.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던 비잔티움 사람들이 간신히 메흐메트의 군대를 막는 듯했지만, 몇 명의 튀르크 군은 성벽의 쪽 문 케르카포르타 하나가 열린 것을 보았고, 그 길은 바로 도시 심장부로 튀르크 군을 이끌었다.


“때때로 역사에서는 인간이 헤아리지 못하는 고매한 뜻에 의해 불가사의한 순간들이 생겨나곤 하는 데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70)


“케르카포르타를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지극히 하찮은 우연한 사건이 세계사를 결정지은 것이다.” (72)


비잔티움을 멸망시킨 메흐메트는 소피아 대성당으로 들어가 “세계의 지배자이신 알라께 첫 기도를 올린다.” (74)


헨델의 부활.

작품, 사업(극장, 오페라) 실패 등으로 고통받던 쉰세 살의 헨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의사는 목숨은 부지하겠으나 음악가로 일하지는 못할 거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건장한 사내는 아직 패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작곡해야 한다! 바로 이 의지가 자연의 법칙에 역행을 만들어 냈다.”(114)


그는 건강을 되찾았고 다시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다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 그에게 도착한 한 소포. 제닌스라는 작가가 보낸 「메시아」라는 제목의 시. 자신의 글에 음악의 날개를 달아달라는 그의 청에 헨델은 불같이 화낸다. 하지만 막상 시를 읽자, 그는 시가 마치 신이 그에게 건넨 말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지상의 모든 음성을 이 말에 합쳐보자. 밝은 음과 어두운 음, 남자의 우직한 음성과 여자의 나긋나긋한 음성, 이 땅의 모든 음성을 이 가사에 가득 채워서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변주하자. 이 모든 음성을 엮었다 풀었다 하면서 역동적인 합창을 이어가자.” (125)


3주간 창작에 몰두한 그의 손에서 펜이 떨어진 순간, 드디어「메시아」가 탄생됐다.

오십 대의 그가 쓰러졌던 날도, 「메시아」가 세상에 처음 울려 퍼진 날도 4월 13일. 이 거장은 일흔넷 4월 13일 기력을 잃고 쓰러진 후 서서히 저물어 간다.


촌각을 다투는 워털루 전투에서 명령만을 기다리다 중요한 때를 놓친,

평상시라면 신중한 장수로 비췄을 그루쉬는 운명의 순간을 놓쳐 역사를 바꾼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 하나가 그런 역사적 의미를 가질 운명이란 걸 예상이나 했을까.


“위대한 순간이 속세의 삶을 사는 인간을 찾아 내려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엉겁결에 불려 나온 사람이 그 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모진 복수를 당하게 된다. 평온한 시절에는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과 같은 시민적 미덕들이 큰 도움이 되지만 웅대한 운명의 순간이 오면 이런 미덕들은 불길 속에 맥없이 녹아내리고 만다. 웅대한 운명의 순간은 늘 천재만을 택해서 불멸의 형상을 부여하는 반면, 우유부단한 자를 경멸하며 밀쳐낸다.” (181)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순간이 됐을 수 있었을 순간을 읊은 시.

....

코사크 놈들이

저편에서 총을 쏘려고 줄지어 선다.

총신이 움직이고... 총포가 찰칵 소리를 내면서...

북소리가 쿵쿵 대기를 가른다.

천년 같은 한순간이다.

이때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멈춰라!

(...)

고귀하신 차르께서

크나큰 은총을 베푸사

판결을 거두 시었으니,

감형을 받을 것이다. (217)


그리고,

톨스토이의 마지막 날들-1910년 10월 말, 톨스토이의 미완성 드라마 「그리고 빛이 어둠을 비춘다」에 부치는 에필로그는 집을 떠난 노구의 톨스토이가 아스타포보 기차역에 도착해 역장의 누추한 방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는 순간을 그렸다.


“아주 평온히 누워 계십니다. 이처럼 차분한 얼굴을 뵌 적이 없어요. 사람들 곁에서는 누리지 못하시던 것을 드디어 여기서 찾으셨나 봅니다. 평화 말입니다. 그분은 처음으로 하나님과 단둘이 계십니다.” (296)


스콧의 남극 탐험 편에서는,

남극을 찾아간 스콧과 일행이 “불과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사람이 찾아온 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달이 백만 번 되는 긴 세월 가운데 딱 한 달 차이로 2등이지만 인류 역사에는 1등이 모든 것을 얻고 2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314)


남극에 두 번째의 깃발을 꽂고 돌아가던 원정팀은 결국 길에서 운명이 다한다.


“인간의 용기는 자연의 막강한 힘 앞에서 서서히 무릎을 꿇는다. 자연은 다섯 침입자를 쳐부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사정없이 발휘하며 죽음의 전령들을 불러들인다.” (317)


죽음을 앞둔 스콧이 쓴 편지들은 “전 인류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대인을 위해 쓰였지만, 앞으로 살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321)


저자가 1942년 예순의 나이에 자살을 하지 않고 계속 살았더라면, 후에 나왔을 여러 개정판에는 '별의 순간' 몇 개가 더 실렸을까. 그 순간들 역시 저자의 말처럼 태평한 억겁의 시간 중 불쑥 튀어나온 순간이었을까.

글쎄.... 그런 순간을 경험하는 게 한 개인에게 행운일까? 불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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