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거침에 대하여』

by 새벽

(홍세화, 2020)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을 지낸 故홍세화 님의 사회 비평 에세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중략)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78)


저자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선 ‘회의하는 자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습관화한 것”이 회의하는 자아의 일상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이런 태도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공자의 『논어』 내용과 맞닿아 있으며, 이런 사람이야말로 변화하는 자신에 대한 희열을 거듭 느끼기 위해서 계속 회의하는 자아로 남을 것이라 말한다. 이어 저자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할 뿐 수정하지 않아 변화가 어렵고”(81), “부부조차 서로를 설득하기 포기한 채 살아가고”(80) 있다고 지적한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난 생각이나 태도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가는 것도, 그들 앞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데도 겁을 많이 내는 편이다. 그들이 나를 공격할까 봐 두려운 것도 있겠지만, 의견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나 혹은 설득을 위해 무수히 반복해야 하는 대화? 토론? 이 너무 소모적이라고 느껴서이기도 하다. 아니면 의견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좁히지는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만 망칠 거란 예단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난... 다른 의견을 듣기만 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관망만 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나에게 부단히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타인과 절충안을 만들고자 노력하지도 않고, 치열하게 토론하지도 않는다. 줄기차게 ‘너는 너, 나는 나’의 태도?를 유지하는... 나 같은 사람들만 있다면, 극단으로 치닫는 혐오의 사회는 모면하더라도, 어떤 결집력도 없는 모래알 같은 사회로 남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공감 능력은 진보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내가 자유인을 지향한다면 타자의 고통과 불행을 공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고통과 불행을 줄일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내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면 타자 또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132)


저자는 한국이 “난민이 난민으로 인정받는 게 신의 일처럼 여겨지는 나라”, “외국인에 대한 인식에 ‘GDP 인종주의’가 강력하게 자리 잡혀 있는 나라”(189)라고 했다. 그는 우리 정부의 난민 정책에 “단일민족, 혈통 보존이라는 전근대적 사고와 함께 제3세계 출신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식이”(197) 뿌리내리고 있다고도 덧붙인다. 이어 저자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공감 능력이나 감정이입에 의해 남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법”(203)이라고 주장한다. 제주도에 온 예맨 출신 난민들에 대한 만연한 혐오 감정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했다는 뜻“(203) 일 수도 있다고 분석하는데. “이 땅을 찾아온 난민은 난민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사된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낸다”(188)는 그의 단언이 아주 무겁게 읽힌다.


어떤 형태든 타인 (동. 식물 포함,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잔혹한 행위를 하는 것은,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감 능력의 결여와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작가들을 많이 만났다.(작품을 많이 읽었다) 이 글의 저자뿐 아니라 요즘 읽은 쿳시나 올가 토카르추쿠의 거의 모든 작품에도 이런 의견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를 존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고,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한다. 짱돌을 던져봐야 소용없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낙숫물에 파이지 않는 돌 없고 나무뿌리에 틈을 열지 않는 바위 없다. 우리는 ‘바위는 확실히 부서진다’는 확실성이 아니라 ‘바위도 부서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이 바라는 사회 변화는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자본과 국가권력이 사회 변화의 확실성을 용인할 리 없다. 확실성이 아닌 가능성, 그것은 더 좋은 세상이 아닌, 덜 추악한 세상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직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좌절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은 이나마 인간적인 세상을 살고 있는 것도 비록 소수이지만 누군가는 비관적 여건과 전망 속에서도 덜 추악한 사회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간다.”(178-179)


“이웃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의 생명을 존중하고, 타자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나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 (203)


오랜 난민 생활을 마치고 들어온 한국에서 쓴소리를 용감하게 내주시던 저자가 편히 영면에 드셨기를 바란다. 그곳에서는 결코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일이 없길 기도하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자유인인가?

나는 나를 존중하고 있나?

나는 타인에 대해 과연 얼마큼이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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