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2026)
“가능한 오래 버텨라.”
작가는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에 “이 책은 나의 마지막 책입니다.”라고 썼다.
Oh, NO!!!
물론 그가 여든의 작가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대체 왜...
이 지적이고 명철하고 즐거운, 그래서 머리뼈 속에 폭 둘러싸여 있는 뇌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듯한 글을 더 이상 못 읽을 거라니 마음이 울적해진다. 책장을 넘기며 한 장 한 장이 너무 귀하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밝힌 것처럼 이 책은 픽션과 논픽션이 합쳐진 일종의 하이브리드 작품이다.
글은 본인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자전적 기억(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 (『The sense of ending』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기억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은 듯하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기억을 무수히 쌓았다는 것이고, 이런 기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고...
팬더믹으로 모든 것이 셧다운이 될 즈음, 그에게 혈액암이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데, 음... 묘하게도, 이 질병은 그를 당장 죽게 하지는 않겠지만,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작가는 천천히 암과 하는 동행에 익숙해져야 한다.
“주위에 역병이 기하급수적으로 퍼지는 동안 자기 집에 격리되고 갑자기 혈액암 환자가 돼버린 작가. 형편없는, 또는 적어도 진부한 소설처럼 들린다.... 그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가 격리에 철저하다. 그보다는 혈액암으로 죽는 쪽이 훨씬 낫다.... 그는 자신의 병으로 죽고 싶다. 다른 모든 사람의 병으로 죽는 건 사양이다.... 혈액암은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형태의 암처럼 느껴진다. (91)
그 후엔 그가 기억하는 대학 친구 두 명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둘이 40년이 지나 다시 만든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낀 작가는 칠십 대에도 여전히 유치한 오해와 실수를 하며 관계를 망쳐가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시금 느끼지만, 많은 인간에게 나이는 그냥 숫자이고 살아온 횟수이기만 한 게 맞는 것 같다. 나이 먹는다고 지혜로워지지도 너그러워지지도 않는다.
다시, 작가의 얘기로 돌아온다. 암과 동행하고 있는 여든의 작가. 그가 적은 죽음에 대한 짧은 단상.
“이것은 무작위적이고, 아무런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저 우주가 자기 일을 하는 것일 뿐. 이 암의 전개와 대단원에 도덕이나 목적을 집어넣지 마라.”(92)
“모든 죽음은 2차 피해를 준다. 죽어가는 사람은 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슬픔에 시달리는 사람은 앞으로 긴 세월 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다.”(94)
“나는 죽음을 늘 있는 것, 나의 삶과 나란히 늘어선 길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시점에라도 어떤 예상치 못한 일군의 요소가 죽음의 방향을 갑자기 트는 순간 죽음은 내 길을 가로지르며 나를 말살할 수 있다.”(105)
“종교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삶은 행복한 결말이 있는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비극적 결말이 있는 익살극, 또는 기껏해야 슬픈 결말이 있는 가벼운 희극이다.”(257)
“부모와 조부모와 그들의 친구들은 어떤 면으로도 ‘무르익어’ 보이지 않았고 그저 늙어 보일 뿐이었다. 일부는 중년으로 늙었고, 일부는 노년으로 늙었고,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무르익지 않았고, 기껏해야 시들었을 뿐이었다.”(258)
작가의 말처럼 늙어간다는 건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뚜렷해 보이지 않는”(226) 상태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많은 노인들이 “무르익지 않고, 시들었다”는 것.
노년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서늘할 정도로 깊고 정확하다. 그래서 서글프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전하는 멋들어진 인사.
“그럼에도 오랜 세월 당신이 우리의 관계를 기쁘게 여겼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히 그랬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 나는 슬쩍 사라지겠다.”(263)
그가 문단에서 영영 자취를 감춘다 해도...
난 아마 그를 계속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