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by 새벽

(J.M. 쿳시, 1999)


유명한 작품인데 이제야 읽었다.

원제가 'Disgrace'인데 왜 ‘추락’으로 번역했을까?

제목에서 걸리면 계속 찜찜한 나는 아직도 이 ‘추락’이란 번역에 완전히 설득된 것 같진 않다. 옮긴 이(왕은철)의 해설은 쿳시의 노트에 있었던 ‘fall into disgrace’라는 메모 때문에 ‘추락’이란 단어를 택했다고 전한다. 어쨌든.... ‘추락’이란 단어를 택해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실익은 꽤 얻은 제목 같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무겁고 다소 불편한 주제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풀었다.

데이비드 루리는 50대의 대학교수로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갖고 있다. 섹스파트너였던 여성이 자취를 감추자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과 관계를 맺는다. 성폭행 수준이다. 그러곤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여자아이? 주변을 맴돈다. ‘추락’의 시작이다.


최악의 인물 (남성)이 아닌가. 그런데 대학 징계를 위해 열린 청문회에 나와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깔끔하게 자신의 유죄를 인정한다. 그나마 자신의 욕망이나 행동에 대해선 정직해 보인다. 당연히 이후 그의 인생은 수직으로 하강한다. 교수는 어떠한 안전장치나 생계 수단도 없이 자신이 평생 살던 세계에서 추방된다.


딸이 살고 있는 시골 농장에 잠시 들렀던 아버지는 더더욱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딸과 교수에게 벌어진 사건은 남아프리카의 복잡한 역사, 정치, 윤리 이슈들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사건 처리 과정에선 보통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딸은 그런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와... 고구마 몇 개쯤 먹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딸, 두 인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아버지에게선 희망을 딸에게선 아쉬움을 보았다.


50대 남자, 대학교수 아버지.

내가 가진 지나친 편견이겠으나 그들은 쉽게(‘결코’가 더 적절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

살아온 시간과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이 단단하게 뭉쳐져 그들에게 두터운 갑옷을 입히기라도 하듯, 그들은 변화에 저항한다. (물론 지적인 얼굴과 그럴듯한 논리로 자신을 잘 변호한다) 그런데 루리 교수는 점차 주변의 고통 (특히, 안락사하는 개들의 고통)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대문자 ‘T’처럼 보이는 교수가 다른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하다니. 그의 공감이 그 상황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지만, 적어도 자신 하나는 천천히 변화시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새벽하늘에 번지기 시작하는 미미한 빛 같은 느낌?

반면 딸은...


함께 살던 여자 친구가 떠난 후에도 고집스럽게 농장을 지키던 딸 루시는 생존능력, 현실 수용 능력이 강해 보인 여성이었지만 끔찍한 사건 후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어느 문제 하나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땅의 주인(남아프리카)이었던 자들의 처분만 기다리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안전만 보장해 준다면 자신이 가진 걸 옆집 남자에게 주고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겠다고 하는 장면에선 굴욕적이란 느낌마저 들었다. 대체 작가는 루시라는 인물을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런저런 사건들 사이에서 교수는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창작을 시도한다. 물론 마무리를 짓지 못할 거라는 강한 의심이 들지만, 난 이런 장면에서 위로를 받는다. ‘추락’해 떨어진 곳에서도 무언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로. 하지만 그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될 수 있을까? 물론 작가는 그 정도의 fairy tale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물의 생명권’은 작가의 다른 작품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슈지만, 그보다 몇 년 전에 발표한 이 작품에도 역시 한 축을 이루는 주제로 등장한다. 작가의 시선은 희망적이지도 않고 어떤 fairy tale도 허용하지 않지만, 그의 냉소적인 시선에도 함께 사는 존재가 한 프레임에 잡히고 그들의 생명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있다는 건 참 중요한 지점인 듯하다.


그는 봉사하는 동물 병원에서 안락사를 시킬 개를 수술대로 옮기고 죽은 후에는 소각장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다. 그곳에서 교수는 소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처리를 쉽게 하려고 포대를 삽으로 두들겨 사체를 부러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모든 존재에겐 최소한으로 지켜주어야 할 ‘존엄’이라는 게 있는 것일 텐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가 특별히 아끼던, 한쪽 다리를 질질 끄는 수캉아지를 안고 수술대로 가자 수의사가 묻는다.


“나는 당신이 일주일 더 살려둘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를 단념하는 건가요?”

“그래요. 단념하는 겁니다.”


아...

이 한 마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거장다운 엔딩이다.


추락 표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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