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by 새벽

(퍼시벌 에버렛, 문학동네, 2024)


2024년 전미 도서상, 2025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흑인 노예 짐(제임스)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장편 소설이다.

짐은 주인이 자신을 팔 거란 소리를 듣고 도망을 선택한다. 같은 시점에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헉과 짐은 우연히 만나게 되고 함께 미시시피강을 따라 북으로 올라간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과는 달리 둘의 여정은 ‘모험’이 아니라 조마조마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도망의 길일뿐이다.


흑인 노예 짐은 (다른 흑인 노예들도) 백인들과 대화할 땐 흑인식의 미국식 방언(African American Vernacular English)을 쓰지만 자신들끼리 대화할 땐 표준어를 용법에 정확히 맞게 쓴다. 한국어 번역도 이 점에 꽤 신경을 쓴 듯하다.

“Was you ’sleep?”

“No, ma’am. I is a might tired, but I ain’t been ’sleep.”

“자고 있었니?”

“아니에여, 마님. 좀 졸렷던 거 가튼데 자구 잇진 안아써여.”


혼자 글을 깨치고 마을 판사의 서재에 숨어 몰래 책을 읽던 제임스는 백인들 앞에선 어떤 이성적 판단도 하지 못하는 존재처럼 행동하지만, 잠이 들면 철학자로 변해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나 볼테르 같은 인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흑인들도 자신들끼리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흑인들이 자유자재로 코드 스위칭을 하는 모습이나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사용 언어와 스피커의 지적 수준과의 상관관계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물론 참 서글픈 장면이다.


꿈에선 철학자로 변신해 자신의 사상을 당당하게 펴던 제임스가 깨어나 직시해야 하는 현실은 두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도망 노예이니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고, 죽음을 넘나들며 자유주라고 알려진 일리노이에 도착했지만, 그곳의 사정도 다른 남부의 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지만, 노예와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유주.’ 사실 이런 이중적인 사람들이 때론 더 무섭지 않은가. 그들은 아마도 수많은 일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을 테니 말이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제임스에게 훔친 몽당연필 한 자루를 전해준 노예는 나무에 매달려 맞다가 결국 죽는 파국을 맞이한다. 죽어가면서도 주인의 연필을 훔쳤다는 사실과 누구에게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는데. 그들에겐 어떤 연대감이 있길래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연 죽음 앞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그들의 눈에 비친 백인은 하나같이 다 비겁하고, 어리석고, 잔인하다.

조금 덜 때리고,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강간하는 정도의 차만 있을 뿐 그놈이 다 그놈으로 그려진다.

피해자의 눈으로 본 가해자의 모습 이어서일까? 정복자, 권력을 가진 자는 왜 그렇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가해자로만 군림해야 하는 것일까. 인류 역사가 늘 그러기만 했던 것일까. (지금 현실만 보아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게 슬프다.) 왜 함께 사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일까. 왜 꼭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인류 문명과 역사는 크게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한 반복되는 되돌이표 지옥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일 뿐.


어른으로 헉을 보살피던 짐과 헉 사이에도 굉장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음...

피부색이 하얀 헉은 제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인생을 살겠지만, 짐은 아마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길 위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도망자에게 머무를 자유란 허락되지 않을 테니.

그는 매일 계속해서 길을 떠난다. 자유를 얻기 위한 몸짓. 투쟁의 여정. 그는 어느 곳에서도 머무르지 않고.

기다림은 노예의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노에는 기다리고, 좀 더 기다리기 위해 또 기다린다. 지시를 기다리고, 음식을 기다리고,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날 때 기독교인에게 찾아오는 정당하고 응당한 보상을 기다린다. (19)


하느님은 없어, 얘들아. 종교는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없어.... 종교는 그저 그들이 편리할 때만 신봉하며 사용하는 통제 수단일 뿐이야. (38)


신과 같은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지. 얘들아, 하지만 그건 그들이 말하는 백인의 하느님 같은 존재는 아닐 거야. (38)


노예가 대체 어디에 대고 화를 낼 수 있겠는가? 노예끼리 서로에게 대고 화를 낼 순 있었다. 우리도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분노의 진정한 근원은 해결하지도 삼키지도 억누르지도 못한 채 견뎌야 했다. (54)


세상은 얼마나 이상한가, 존재란 얼마나 이상한가, 본래 평등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그 평등을 입증해야 하고,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만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다니,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다니, 또한 그런 주장에 대한 전제가 평등을 부정하는 이들의 검토를 거쳐야만 한다니. (75)

헉은 이 모험에 완전히 신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점에 감탄했고, 사실을 말하자면 부럽기도 했다. 죽거나 그보다 더한 일을 당할 염려가 없는 세상에 살면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95)


저는 머든지 소원을 비는 게 무서운 거 가타여. (99)

저는 일케 생각해여. 무엇이 옳은 일인지 규칙으로 정해줘야 아는 사람이라면, 그걸 일일이 설명해줘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럼 그자는 절대루 옳은 일을 하는 조은 사람이 댈 수 엄쓸거예여. 뭐가 올구 그른지 신이 알려줘야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평생 뭐가 올은지 모를 거구여.(107-108)


성경은 가장 흥미롭지 않은 책이 되었다. 성경책은 읽기 시작할 수도 없었고,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바탕으로 나는 내가 성경책을 적들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여전히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압제자는 반드시 피해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122)

사람들은 원래 이상해여. 믿구 시픈 거짓말은 믿으면서 무서운 진실은 무시하구 시퍼하져. (169)


겉껍질에 불과한 그 여자의 외면만 보고도 나는 여자의 본질까지도 모두 외면으로만 이뤄져 있음을 깨달았다. (226)


불안은 노예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이지만, 그 순간에 나는 불안을 느꼈다. 백인에게 느끼는 분노는 노예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이지만, 나는 분노를 느꼈다. 분노는 좋은 나쁜 감정이었다. (232)

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뛰었는데도 그 어디도 새로운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도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288)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피부색이 가진 힘을 다시금 감탄했다. 피부색만으로 기관실에 있는 노예를 당황시키고 통제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노먼이 가장 가난하고 형편도 최악인 백인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두려움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307)


끝이 있을까? 그게 문제라네, 전쟁이 끝났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은 승자가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지. (343)


만약 지옥을 고향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지옥으로 돌아가는 게 귀향이 아닐까? (352)


누구를 위한 복수일까? 한 가지 행위에 대한 복수였을까, 아니면 다수의 행위에 대한 복수였을까? 한 남자에게 한 복수였을까, 다수의 남자에게 한 복수였을까, 아니면 이 세상에 복수한 거였나?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궁금했다. 악한 걸 죽이는 게 악한 일일까? 사실대로 인정하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무심함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 궁금해졌다. (370)

지금까지 평생 두려움을 느껴 왔으니 이제 더는 두려울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72)


내 이름은 내 것이 되었다. (374)


그럼 넌 누구지?

저는 제임스예요.

제임스 뭐?

그냥 제임스요.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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