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경전에 나오는 선인 로히땃사는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백 년 동안 쉬지 않고 걸었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한 채 죽었다고 한다. 인생의 디폴트 값은 고통이란 얘기같이 들린다. 슬픈 얘기다.
John Green의 소설 The Fault in Our Stars (2012,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엔 오랜 시간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십 대들이 등장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 아이들 이야말로 디폴트 값이 고통인 아이들 같다. 하지만 자신들을 professional sick person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은 아픈 상태로 오래 살아 그런지, 다른 십 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물론 Hazel은 코에 튜브를 끼고 언제나 작은 산소통을 갖고 다니고, Augustus는 골육종으로 잃은 한 다리 대신 의족을 낀 채 살고 있고, 두 눈을 다 잃은 Issac은 익숙지 않은 어둠에 적응하느라 작은 일 하나도 남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상태지만, 이들은 익숙하게 십 대 같은 일상을 산다.
Augustus는 살짝 우울해 보이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가씨 Hazel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Hazel은 잘생긴 청년 Augustus가 걸어오는 작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소극적으로 반항하지만, 곧 그에게 빠져 버린다. Issac은 어둠 때문에 좌절하지만, 그보다는 연락을 끊어 버린 여친 때문에 더 좌절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Julius Caesar에서 인용했다고 하는 이 글의 제목 Faults in our stars는 아이들이 가진 불치병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님을, 고통 중에도 사랑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대한 찬사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매일 죽음에 위협당하는 아이들의 얘기를 쓰려고 십여 년 노력했다고 했다. 한껏 미화되고 극화되어 죽음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특별한 아이들이 아닌, 그냥 끔찍한 아픔과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의 얘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니…. 참으로 쓸쓸할 수도 있을 얘기란 소리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아이들의 얘기가 내겐 잔잔한 위로였다.
Hazel은 Augustus의 도움으로 바라고 바라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소설을 쓴 작가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에 가는 거였는데, 역시나…. 현실의 그 작가는 이 어린 숙녀가 몇 년을 소중히 키워온 환상과 궁금증을 단칼에 날려 버리는, 예의 없는 알코올 중독자에 불과했다. 실현에 옮기기 꽤 어려웠지만 죽을힘을 다해 밀어붙였던 일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면,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고 허무했을 텐데, Hazel은 그렇지 않았다.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해외여행이란 걸 감행했다는 사실이 주는 뿌듯함이 있었고, 그리고 그곳에서 Augustus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고통 중에도 행복을 느낄 일은 있는 법이겠지.
작가의 말처럼 이건 아픈 사람들의 현실적인 얘기이니, 보통 우리가 청소년 소설에서 예상하는 꿈과 희망을 주는 결론 같은 것은 결코 없다. 놀라운 반전은 (사실, 뭐 놀라울 것도, 반전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완치 판정을 받고 1년 이상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온 Augustus의 몸에서 여기저기로 퍼진 암 덩이가 발견되고, 언제가 될까 늘 위태로운 Hazel은 글이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단 거다.
Hazel은 비교적 담담한 눈빛으로 하루하루 망가져가는 Augustus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산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내일도 전화를 걸면 Augustus가 그 전화를 받기만을 바라는 소소하고 소중한 일상을 살아간다. After some TV, I went to sleep. (TV를 좀 보고는 자고) I woke up. (그리곤 일어나서) Around noon, I went over there again. (정오쯤 다시 그곳엘 가고) A typical day with late-stage Gus (말기의 하루를 살고 있는 그와 또 일상을 보내고)… 이 단순하고 담백한 문장의 여운이 이렇게 클 수도 있다는 건, 특별히 이 글을 읽으면서 건진 매우 큰 수확이었다.
According to the conventions of the genre, (보통 이런 장르의 얘기라면) Augustus kept his sense of humor till the end, did not for a moment waiver in his courage, (거스는 마지막까지도 유머와 용기를 잃지 않았고) and his spirit soared like an indomitable eagle. (그의 정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강건했다,라고 표현이 돼야겠지만) But this was the truth, (현실의 거스는) a pitiful boy who desperately wanted not to be pitiful, (남에게 불쌍해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아주 불쌍한 아이였고) screaming and crying, poisoned by an infected G-tube that kept him alive, but not alive enough. (목숨을 유지하려면 붙이고 있어야 하는 G튜브가 감염돼, 소리 지르고 울며 고통에 시달리는 죽어 가는 소년일 뿐이었다.)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습 같은 걸 애써 피하려고 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작품은 결코 선택되지 않겠지만, 말했던 것처럼 내겐 쓸쓸하지만 큰 위로기도 했다. 로히땃사 같은 선인이 아무리 애써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삶의 디폴트 값이 고통이라면, 그 안에서도 일상은 천천히 흘러야 하는 걸 거다. Augustus를 보내고도 또 하루를 사는 Hazel과 Issac 처럼…
죽어가던 Augustus가 제일 두려워했던 건 자신이 잊히는 거였다. 그건 떠나는 누구에게나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말이다… 잊히는 날은 없을 거다.
“우에 있겠노! 절대 못 잊는다! 그냥 없이 사는 데 익숙해지는 거다!”
몇 차례 보았던 공연에서 아들을 먼저 보낸 한 아버지가 했던 대사였고, 온 마음을 다해 공감했던 대사기도 하다. 아마 Hazel도 Augustus를 잊는 날은 없을 거다. 우에 있겠노 말이다!! 이렇게 예뻤던 그를...
Hazel은 아마 건장하고 빛났던 Augustus도, 끔찍한 고통에 울었던 Augustus도, 다 기억할 것이다. 그게 기억이고, 사랑이고 그리고 사는 게 아닐까?
아직도 살아갈 날들이 새털처럼 많다고 해서 아프고, 죽는 문제를 꼭 멀리 할 건 아니다. 19살에도 29살에도 아플 수도, 이별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일이 될 수도, 사랑하는 이들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그래도 또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디폴트 값이 고통인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