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일은 녹록지 않았다.
한 달간의 연수원 교육이 있었지만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바로 창구에 앉아 손님을 받았다. 고객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누가 봐도 신입직원인 나를 얕잡아 보는 고객들도 많았다.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MVP고객으로 부터 "야이, 돌대가리야! 내가 누군 줄 알아?"
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몸이 얼어붙었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직원이 없었다. 참 삭막한 곳이구나 생각하며 탈의실에서 혼자 울었던 기억이 있다.
좋은 고객들도 많지만 유독 안 좋았던 고객들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따라다닌다.
어떤 지점에선 신분증을 던지며 업무 요청한 고객과 기싸움을 해야 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내가 한 말을 종이에 적어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고객의 말과 행동에 이리저리 휘둘렸고 내가 잘못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끝은 항상 죄송하다였다. 그리고 못난 내 모습에 자책했고 스트레스는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풀어버리는 악숙환이 반복됐다.
우울증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만성감기처럼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울증인지 몰랐고 알았을 땐 인정하기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 발로 병원을 갈 수도 없어서 그대로 방치하길 수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별 탈 없이 업무를 마감하는 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내 자리 전화가 울린다는 건 나를 찾는다는 건데 이 시간에 직통으로 오는 전화는 대게 민원성 전화가 많다. 받기 싫었지만 수화기를 들었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러댄다. 며칠 전 업무하고 간 여성분의 배우자다.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고래고함을 질러대며,
"네가 병신이나 와이프가 병신이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고!" 그러면서 당장 본인이 있는 곳으로 와서 사과를 하란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고객이었다. 업무내용뿐 아니라 입은 옷, 쓰고 온 모자, 바른 립스틱 색깔까지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며 발악을 했다. 나도 잘못한 게 없었기에 내가 할 말을 하고 업무 원하면 직접 오라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세게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나를 몰아가는 고객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불구덩이 같았다. 그 빛이 좋아 들어왔는데 '바싹'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타버린 한 마리 나방이 돼 버렸다.
그 뒤로 몸이 좀 이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심장병 환자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회사에 가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업무시간 끝날 때까지 두근 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회사일에 집중이 안 됐고 번호를 호출하기가 무서웠다. '나한테 혹시 소리 지르진 않을까? 업무 하다가 인상 구기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는 손님마다 눈치보기 바빴다.
그리고 며칠 뒤, 전화로 소리를 질렀던 고객이 은행에 왔다. ATM기 사용을 위해 왔는데 머가 또 잘 안되는지 청경에게서 잠시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또 소리를 지르고 카드를 집어던지며 기계를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내게 또 "병신"이라고 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순간 내 손에 칼이 있다면 저 사람 배를 갈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은 두근거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불안장애였다. 회사에 있으면 불안했던 거다. 우울증에 불안까지 떠안게 됐다. 병원 가는 일이 시급해 보였지만 혼자 가는 게 겁이 났다. 정신병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사 발령이 났다. 가서 들은 얘기지만 별난 고객이 많다고 그러려니 생각하고 일을 하란다. 하루만 일해보고 알았다. 최악의 점포에 발령받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