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5권 4장)

계엄 정국 한복판에서(1)

by 또 래 호태

대통령의 후회


TV 자막이 두 줄로 고정됐다.

계엄 검토 중단

내란 관련 수사 착수


대통령실은 조용했다.
조용한 방일수록, 결정은 더 빨리 내려왔다.
비서실장이 문서철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에 적힌 제목이, 오늘 밤의 단어보다 더 무거웠다.

**국공위 위원장 국민공모 추천제 시행 안(개념서)**


대통령이 물었다.


“이걸 지금 가져온 이유가 뭡니까.”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대통령님, 지금이 아니면 못 씁니다.”


대통령이 표지를 넘겼다.

그는 첫 페이지를 읽지 않았다. 대통령은 첫 페이지의 제목만 읽었다.


*시행령(선제) / 공개 절차 / 3인 추천 / 대통령 임명 / 검증 기록*


대통령이 두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의 문장도 읽지 않았다.

다만 두 번째 페이지의 구조만 봤다.


‘국민 추천’이 ‘세 명’으로 압축되는 그림.

‘대통령 임명’이 ‘공개 절차’에 묶이는 문장.

‘검증’이 ‘의견’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는 조항.


대통령의 손이 멈췄다.

대통령의 손이 멈춘 지점은 ‘시행’이라는 단어 위였다.


대통령이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하….”


비서실장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의 한탄이 어디로 흐르는지 기다렸다.


대통령이 말했다.


“이건… 칼이 아니네.”


비서실장이 그제야 대답했다.


“예, 대통령님. 이건 칼이 아닙니다. 이건 질서입니다.”


대통령이 TV를 봤다.

TV는 계속 떠들었다.

대통령은 자막만 봤다.

그리고 자막 아래에 깔린 공포를 봤다.

대통령은 그 공포가 ‘한 번 본 칼’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았다.


대통령이 서류철을 다시 봤다.


“이걸 먼저 했더라면….”


그는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통령은 자기 머릿속에서 이미 끝을 봤다.


‘계엄’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의 정국.

‘내란’이라는 단어가 붙기 전의 야당.

‘수사’라는 단어가 뜨기 전의 거리.


대통령이 낮게 말했다.


“이걸 먼저 했더라면, 저 단어들이 안 나왔겠지.”


비서실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님, 맞습니다.

이 시행령은 ‘명분’을 먼저 줍니다.

이 시행령은 ‘절차’를 먼저 깔아줍니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그럼 왜 지금이야.”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지금은 칼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칼이 보이면, 국민은 ‘누가 책임지냐’를 묻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건 말이 아니라 절차입니다.”


대통령이 서류철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종이를 누르며 시간을 눌렀다.

대통령이 말했다.


“대체… 왜 항상 늦게 도착하냐.”


비서실장은 알고 있었다.

대통령의 원망은 사람에게 향할 수도 있고, 시간에게 향할 수도 있었다.

비서실장은 그 원망이 사람에게 붙는 순간,

다음 장면이 더 더러워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스스로 답을 붙였다.


“내가 먼저 쏠 카드를… 못 쥐고 있었어.”


대통령이 ‘시행’이라는 단어 위에 다시 손가락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시행령’이었다.

그는 ‘계엄’이 아니라 ‘시행령’에서 먼저 살아남는 길을 봤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이거, 나가면 뭐가 바뀝니까.”


비서실장이 짧게 대답했다.


“대통령님이 ‘칼’로 정국을 정리하려 했다는 의심이,

‘질서’로 정국을 정리하겠다는 선언으로 바뀝니다.”


대통령이 물었다.


“야당은.”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야당은 막기 어렵습니다. 막으면 ‘검증 회피’가 됩니다.”


대통령이 물었다.


“여당은.”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여당은 올라타야 합니다.

올라타려면 낡은 방식부터 잘라야 합니다.

공천 장사, 동원, 프레임 장사. 그걸 못 자르면 시행령이 오염됩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기분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그는 이해했다. 이 문서가 자신을 살리는 동시에, 자신을 묶는다는 것을.


대통령이 말했다.


“이거는… 되돌리기 어렵겠네.”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예, 대통령님. 그래서 지금 쓸 가치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TV를 껐다.

화면을 끄는 손으로, 밖의 소리를 끊었다.

그는 이제 말이 아니라 버튼만 남겨두려고 했다.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탄식했다.
이번 탄식은 후회가 더 컸다.


“아… 이걸. 계엄 카드 전에. 먼저 했더라면.”


비서실장이 그 문장을 받았다.

그는 그 문장을 문서 맨 위에 붙일 줄을 알고 있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탄식을,

대통령의 결단으로 바꾸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다.


대통령이 펜을 들었다.

서명란을 보지 않았다.

시행 날짜를 봤다.


대통령이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잡아요.”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예, 대통령님.”


대통령은 펜을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펜을 들고 한 문장을 더 말했다.

이 문장은 누구를 향한 원망도 아니었다.

이 문장은 자기 자신을 향한 확인이었다.


“다음엔… 늦지 않게.”


그리고 대통령은 펜을 내렸다.

그날 밤, 비서실장은 ‘시행’ 날짜를 오늘로 당겼다.


국무총리실을 경유한 공문은 새벽에 발송됐고,

아침엔 공고문 형식으로 바뀌었다.


다음 회차: ‘국공위원장 국민공모 추천제’ 공모 계획 공고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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