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사랑-운명

그래. 운명이었어

by 또 래 호태


동이가 추구해 온 삶의 방향은 언제나 밝음이었다.

그 밝음은 타고난 낙천이 아니라,

어둠을 통과한 사람이 끝내 놓지 않은 선택이었다.


두 번의 상실은 동이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에는 한 글자만 남겼다.

남편이 남긴 단 한 글자, ‘빛’.


동이는 그 글자를 유언처럼 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말 것.

살아남은 자에게 내려진 가장 단단한 부탁.


호태 역시 같은 쪽을 보고 걸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일출을 바라보며 마음을 세우고,

태양을 희망으로 끌어안으며 다시 걸음을 떼던 사람이다.


채석장 일출.jpg 채석장의 일출


몸이 무너지고 삶이 꺾였던 시기에도,

그는 “내일” 쪽을 완전히 등지지 못했다.


넘어져본 사람만이 아는 확신이 있다.

희망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희망은 결국, 어제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것.


그래서 소설의 부제가 ‘두 개의 태양’이라는 말은

낭만적 수사가 아니라, 이 사랑의 구조다.


동이도 태양이고 호태도 태양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각자가 태양인 채로도 서로를 따라 도는 해바라기가 된다는 데 있다.


누구 하나가 빛이 되고 다른 하나가 그 빛에 기대어 사는 관계가 아니다.

둘은 이미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들이었다. 그

럼에도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것은 의존이 아니라 알아봄이다.

“당신도 빛이구나.” 하고, 오래전부터 같은 언어로 살아온 사람을 알아보는 일.


파랑새라는 상징도 거기서 생겨난다.

둘은 서로의 파랑새이고 싶었고,

또 파랑새를 찾아 오래 걸어왔다.


젊은 날의 파랑새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었다면,

중년의 파랑새는 다르다.

“내가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사람”,

그리고 내가 다시 꿈을 향해 걷게 해주는 사람”이다.


동이에게 호태는 사람도 하늘만큼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준 존재이고,

호태에게 동이는 초라함 속에서도 다시 품위를 회복하게 해주는 존재다.


그러니 이들의 만남은 “사랑을 찾은 이야기”라기보다,

빛을 잃지 않으려 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빛을 확인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상징들이,

이상하리만치 한 지점에서 맞물린다.

충주. 평안의 강가. 이디야 교통대점.


마치 서로 다른 궤도를 돌던 두 태양이

어느 날 같은 하늘의 좌표로 끌려 들어온 것처럼.


우리는 이런 우연을 가끔 만난다.

장소가 겹치고 시간이 겹치고,

대수롭지 않은 선택들이 겹쳐져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데 동이와 호태의 이야기는 겹침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결의 장면들이 자꾸 이어진다.


우연은 한두 번은 사건이지만, 반복되면 징조가 된다.

그때 사람은 운명을 “믿는” 게 아니라, 운명을 인정하게 된다.


호태의 군번 24004는 그 운명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숫자 하나가 우연히 기호로 남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의미로 번역된다.

“이 사람을 영원히 사랑해.”


사랑이 숫자로도 살아남는다는 건,

이 이야기의 세계관이 말하는 바다.


그리고 그다음에 또 하나의 표식이 겹친다.

동이가 살아가는 집의 호수,

1404호.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해."


숫자는 말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둘의 삶에서는 숫자가 자꾸만 말을 건다.


한 사람은 ‘빛’이라는 한 글자를 남김으로 받았고,

한 사람은 24004라는 숫자를 품고 살아왔고,

동이의 1404는 그 둘의 길을 현실의 좌표처럼 고정해 준다.


우연이 반복되면 징조가 되고, 징조가 겹치면 운명이 된다.


중년의 사랑에서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만남”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명은 “정해지지 않은 삶” 속에서,

끝까지 같은 방향을 선택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에 생긴다.


동이는 밝음을 선택했고,

호태는 희망을 선택했고,

그 선택들이 만나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러니

이들의 사랑이 운명이라 불릴 자격을 얻는 지점은

만남 자체가 아니라, 만난 뒤에 이어진 선택들이다.


겁이 나는데도 말하는 용기,

무게를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서 함께 들어주는 태도,

삶을 흔들지 않고 지켜주는 배려.


그런 날들이 쌓여서, 사랑은 사건이 아니라 운명의 지속이 된다.


마침내

평안의 강가에서 물결이 빛을 받아 반짝일 때,

동이는 알게 된다.

평안의 강가.jpg 평안의 강가


남편이 남긴 ‘빛’은 과거의 유훈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신호였다는 걸.


호태도 알게 된다.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일출의 희망은

혼자만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내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두 태양은 서로의 빛을 빼앗지 않고, 서로의 빛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태양이 태양을 만나면 더 눈부셔지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떠 있을 수 있게 된다.

이윽고 두 태양이 만났다.

그때부터 세상은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이와 호태의 사랑은

세상을 밝히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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