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겨울 오후였다.
아파트 정문을 나와 해를 등지고 걷기 시작하자, 정면에서 호된 북풍이 얼굴을 때렸다. 바람이 말이 아니라 주먹으로 후려친 듯 아팠다. 나는 만주 땅 골목에서 군고구마 장수가 쓰던 것 같은 털 귀달이 모자, 그러니까 우샨카 같은 모자를 눌러썼다. 롱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기모바지를 당겨 입었다. 중무장이었다.
그런데도 바람은 비집고 들어왔다. 얼굴에서 가려지지 않은 틈을 찾아 찬기를 꽂았다.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만큼 매서웠다. 기모바지 아랫단을 타고 들어온 한기가 발목에 달라붙었다. 내복을 껴입지 않은 선택이 잠깐 후회가 될 정도로, 겨울 삭풍은 잔인했다.
그 순간, 문득 노랫가사가 떠올랐다. “미아리 눈물고개…” 북풍한설에 맨발로 절뚝이며 끌려가던 고개.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겨울바람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노래다. 오늘의 바람도 그 노래처럼 사납게 불었다. 기모바지도 롱패딩도 없던 시절, 맨발로 끌려가던 그때의 아버지는 얼마나 추웠을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 길에 나선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녀가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을까. 바람이 거셀수록, 가슴은 더 부풀어 올랐다. 찬기가 발목을 붙잡아도, 기대는 심장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겨울바람을 뚫고 가는 걸음이 자못 비장해졌다.
잠시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옮기는 발걸음이 늦었다. 그래서 나는 걷다가, 뛰었다. 숨이 차오르면 걸었고, 숨이 가라앉으면 또 뛰었다. 뛰는 동안에도 자꾸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커피를 내리다 문득 고개를 들고, 나를 확인하는 순간. 눈이 먼저 반가움을 알아보고, 그다음에 웃음이 번질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 '이 추위에 어떻게 왔어.' 말은 그렇게 나오겠지만, 속마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도.
걸으면서 혼자 고개를 저었다. 상상은 늘 현실보다 한 발 앞서간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실은 그 상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한 번 확인했고, 놀란 듯 눈이 커졌다가 곧 웃었다. 그리고 던진 한 마디. “이 추위에… 어떻게 올 생각을 다 했어?” 그 말에는 핀잔보다 반가움이 먼저였다. 나는 숨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 웃기만 했다.
그걸 본 그녀가 내 팔을 가볍게 톡 치며 말했다. “뛰어왔지?”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녀는 내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손이 왜 이렇게 차.”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걱정과 배려가 다 들어 있었다. “다음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아프면 안 돼요.” 그 말은 부탁도 명령도 아니었다. 같이 오래가자는 사랑의 말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놓고 잠깐 뒤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곧, 김이 은근하게 올라오는 컵을 하나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라도 좀 마셔요. 대추차에 생강 듬뿍 넣었어요.” 컵을 감싸 쥐는 순간, 손바닥부터 먼저 풀렸다.
유리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얼어 있던 손끝을 차분하게 녹였다. 한 모금을 마셨다. 달지도, 맵지도 않았다.
대추의 단맛이 먼저 지나가고 뒤늦게 생강의 열이 목을 타고 내려왔다. 그 온기가 가슴께에서 한 번 멈췄다가,
천천히 몸 안으로 퍼졌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풀렸다.
“괜찮죠?” 그녀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딱 좋아요.” 그 말은 차에 대한 대답이었지만, 사실은 이 자리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녀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몇 번이고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반가움, 안심, 신뢰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 그 말이 굳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눈빛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시선을 가슴에 담았다. 오늘의 보상은 그걸로 충분했다. 추위를 뚫고 온 이유도, 뛰다 걷다를 반복한 이유도 전부 설명이 끝났다. 아마 이 장면을 누군가 본다면 조금 설렐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잠깐, 괜히 질투가 날지도 모르겠다. '나도 저런 사랑이면 좋겠다.' 그 소망이 떠오른다면, 이 이야기는 이미 제 몫을 다 한 것이다. 대추생강차의 온기는 내 손에서 쉽게 식지 않았다. 컵을 내려놓은 뒤에도 그 온기는 한참 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잠시 더 머물다,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문을 나설 때 그녀가 말했다. “조심히 가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또 올게.” 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일정처럼 자연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람이 등을 밀어주었다. 해를 따라 걷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따뜻하게 한 건,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시간의 잔열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문득문득 오늘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웃음, 손을 감싸던 순간, “아프면 안 돼요”라는 말.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나는 뛰지 않았다. 온기는 이미 충분했고. 해를 바라봤고, 마음은 조금 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굳이 뛸 이유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 문을 닫자 바깥의 겨울이 완전히 차단됐다. 혼자된 방 안에 서서 나는 잠깐 그대로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흠뻑 차올랐다. 이 따뜻함을 남기고 싶다. 전하고 싶다. 서둘러 브런치를 열었다. 오늘 분 칼바람에 나만 그녀에게 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 또는 그에게 간 많은 사람이 모두 따뜻했기를 바란다.
나의 안도는 그녀를 만날 수 있는데서 나온다. 거기에 가면 늘 그곳에 있는 나의 사랑. 그 사람을 알기 전까지 한 겨울의 삭풍은 그저 내게 칼바람이었다. 오늘의 바람 또한 그때와 다르지 않았으나 오늘 내 마음은 황량하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그저 따뜻했다. 겨우내 나는 따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 또 거기에 갈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