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가 될 뻔한 청소부
그것은 권유가 아니라 기도에 가깝다.
삶의 뒤안길, 더 이상 돌아갈 교차로가 남지 않은 그 자리에서 비로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도무지 들리지 않던, 아니, 들릴 리 없었던 존재의 가장 낮은 음역— 그것이 채석장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채석장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우호적인 땅이 아니다.
바람은 돌가루를 날리고, 하늘은 언제나 흐릿하여 계절을 잊게 하며, 발아래는 삶의 잔해처럼 부서진 석분으로 가득하다. 풀 한 포기 뿌리내리기를 포기한 땅,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회색의 적막.
그러나 이 땅 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는 이곳이 내 삶의 끝자락이 아니라, 내 존재가 다시 깨어나는 시원(始原)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오래전 잊힌 우물 하나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물을 길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삽을 드는 일은 노동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팔이 아팠고,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노동은 묵언의 수행이 되었다. 삽날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을 때의 금속성 울림— 그것은 바깥의 소리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 가장 깊은 퇴적층을,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체면과 허영과 두려움의 지층을 한 겹씩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다.
거친 바람이 등줄기를 스칠 때마다
오래된 후회와 슬픔이 조금씩 살갗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벗겨지고 있었다. 세상이 입혀준 옷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덧칠해 온 가면이 벗겨지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사람이 반드시 한 번은 육체의 고단함을 통해 마음을 정화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마치 강물이 바다에 이르기 직전, 가장 깊고 맑은 침묵 속으로 잠기듯이.
반복되는 삽질을 하던 어느 날, 시시포스가 떠올랐다.
산 아래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고, 정상에 이르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그 영원한 노동. 그의 형벌은 신이 내린 것이었으나, 나는 삶이라는 장터 한가운데서 전혀 다른 생각에 이르렀다.
'만약 그 돌을 산 위로 올리는 일이 그의 존재를 회복하는 길이었다면?' '
만약 그 무의미 속에서 의미가 싹트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 순간, 반복은 형벌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재건하는 과정, 낡은 나를 허물고 새로운 나를 세우는 의례(儀禮)로 느껴졌다. 돌이 굴러 내려올 때마다 시시포스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이었다.
그 순간 나의 삽질은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시시포스의 돌처럼 나 역시 내 안의 무거운 심연에 삽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삽질의 삶은 성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완성도, 결과도, 누군가의 박수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무한 반복되는 행위 자체가 삶에 다시 '방향'을 부여했고, 그 방향이란 다름 아닌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었다.
채석장에서 만난 동료들은 삶의 철학을 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책을 인용하지 않았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묵묵함과 배려는 어떤 문장보다 더 깊은 가르침을 품고 있었다. 무거운 돌더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옆자리를 채워주는 사람, 물통을 건네며 눈으로만 미소 짓는 사람, 점심시간에 김밥 한 줄을 반으로 나누는 사람— 그들은 나의 과거를 묻지 않았고, 지금의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함께 땀을 흘리는 그 순간,
사람 사이에는 말보다 더 오래 머무는 선한 온기가 있음을 알았다. 그 온기는 위로보다 먼저 왔고, 이해보다 깊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고, 작아진 만큼 비로소 가벼워졌다.
그렇게 채석장은 몸이 회복되는 장소를 넘어 마음이 다시 태어나는 성지가 되었다.
석분 날리는 바람 속에서 나는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나의 얼굴, '되고 싶었던 나'를 조용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꿈, 청년 시절의 다짐, 세월 속에서 먼지처럼 날아간 그 약속들이 이 거친 땅 위에서 하나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굴이 완료된 장대한 바위산에서 문득 어떤 이미지를 발견했다. 어린 시절 가슴속에 새겨두었던 큰 바위 얼굴.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속, 평생 자신이 닮고자 했던 그 얼굴을 올려다보던 소년. 세월이 흐르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등이 굽고, 목소리가 잦아들어도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그 시선. 그리고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깨닫는다. 그 소년이, 아니 이제 노인이 된 그가 마침내 큰 바위 얼굴을 닮아 있다는 것을.
그 믿음, 그 성실함, 그 조용한 인내—
그것이 바로 인간이 꿈을 꾸는 방식이었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닮아가는 과정이었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완성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얼굴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채석장의 먼지가 내 과거를 지워준 자리에 오래된 꿈이 새 살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삶이란 결국, 자신이 닮고자 하는 얼굴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일이다.
꿈을 잃어버리면 그 얼굴도 잃어버리고, 길을 잃으면 자신조차 잃어버리지만, 꿈을 회복하는 순간 그 얼굴이 다시 빛을 얻는다. 설령 주름이 깊어지고, 걸음이 느려져도, 눈빛만은 다시 맑아진다. 꿈을 향해 걷는 사람의 눈에는 늙음이 감히 들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간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예순이 넘으면, 한 번쯤 채석장에서 삽을 들어보라고. 그곳은 사람을 낮추는 땅이 아니라, 사람이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고. 삶의 본질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 묻고, 오염된 사회에서 오염된 자신의 시간을 정화하며,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되찾는 자리— 채석장 청소부.
나는 그곳에서 다시 나를 세웠고,
다시 꿈을 품었으며,
마침내 내가 닮고자 했던 얼굴을 다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돌가루 날리는 그 회색 벌판에서 나는 생의 가장 투명한 새벽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