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안전모
첫 한 달을 지내보니
채석장은 망가진 내 심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임을 깨달았다.
하여 '오래 근무하리라'는 결심을 굳혔다.
새로울 결심
귀. 추의 기로!
채석장은 내 남은 인생을 귀한 노년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추한 말년으로 보낼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찾아온 곳이었다.
이전의 '삶의 태도'로는 추한 말년을 보내고 말 것이 뻔했다.
귀한 노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새로울 결심'이 필요했다.
새로울 결심의 출발점. '늘 깨어 있으리라'는 다짐
단순한 일상의 반복, 날마다 똑같은 하루. 나태해지지 않으면 이상한 환경.
"오늘도 하루를 때웠다."라고 안도하는 동료들.
타성에 젖는다면 나 역시 그들처럼 반면교사의 본보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직장.
그렇지 않기 위한 방법은 하나. 늘 깨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이런 비장함은
굳이 폼을 잡으면서까지 다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을 오래지 않아 온몸으로 알게 됐다.
채석장은 위험이 특정 지점에만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니다.
발파 작업 같은 큰 위험뿐 아니라,
골재가 이동하고 분쇄되는 전 과정에 사고의 가능성이 흩어져 있다.
익숙해질수록 위험은 희미해지고,
그 틈을 타 사고는 다가온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방심이 가장 위험하다.
가장 위협적인 사고 중 하나는 컨베이어벨트 끼임 사고다.
벨트는 채석장 곳곳에 설치돼 있고, 그 주변 통로는 늘 비좁다.
옷자락 하나, 순간의 방심 하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가장 확실한 예방책은 단순하다.
설비가 돌아갈 때는 다가가지 않는 것.
조심하는 것보다, 아예 거리를 두는 것이다.
또 하나 늘 신경 쓰이는 건 낙상과 낙하물이다.
채석장의 설비는 크고 높다.
많은 작업이 상층부에서 이루어지고, 그 아래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하층에서 일할 때는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고,
상층부에 올라가면 아래에 동료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이 단순한 확인이 사고를 막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었다.
좌충우돌 안전모
그리고 내 머리 위에는 늘 안전모가 있었다.
채석장 작업동은 좁고 낮고 복잡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머리를 부딪치기 십상이다.
전입 초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 쿵, 저기 쿵 부딪쳤다.
내 안전모만 그런 줄 알았는데, 동료들의 안전모 역시 긁히고 찌그러진 자국투성이었다.
좌충우돌은 개인의 부주의라기보다, 이곳의 일상이었다.
“에이 씨, 또 부딪쳤네.”
이 말은 자책이라기보다 예견된 해프닝에 대한 푸념이었다.
조심했는데도 또 부딪쳤다는 체념,
그리고 앞으로도 또 그럴 거라는 예감이 섞인 웃픈 탄식이었다.
안전모 덕분에 충돌의 고통이 크지 않다는 점도 한몫했다.
맨머리였다면 숨이 막힐 통증이었겠지만, 안전모는 그 충격을 ‘띵’ 하는 울림 정도로 바꿔주었다.
그 덕에 나는 조금 무뎌졌고, 조금 용감해졌다.
하지만 그 ‘뜨거운 맛’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곳에서 반복되는 충돌은 줄어들었다.
작업 전, 어디서 부딪쳤는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졌다.
위험예지 훈련은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기억을 불러내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머리를 많이 쓰게 된다.
동선을 계산하고, 주변을 살피고, 동료의 위치를 확인한다.
극도의 긴장은 스트레스지만, 적당한 긴장은 오히려 몸과 정신을 또렷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긴장은 생존의 감각이다.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택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특히 노년의 생존을 생각하면, 작업 중 내 한 몸을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건강은 병이 없다고 유지되는 게 아니다.
외상, 특히 골절은 삶의 질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생업이 멈추고, 생계가 흔들린다.
잘 먹고 잘 자는 모든 노력이 부질없어진다.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이, 한 번의 부주의로 큰 부상을 입어 다시 생존을 걱정하게 된다면—
그건 비극적인 코미디다.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채석장에서는 깨어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곳의 깨어있음은 거창한 각성이 아니다.
돌아가는 벨트에 다가가지 않는 것,
위에서 일할 때 아래를 먼저 보는 것,
어제 머리를 부딪친 철제 모서리를 오늘은 피하는 것. 그런 아주 구체적인 행동들이다.
오늘도 작업동을 지나며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발을 살핀다. 채석장의 소음 속에서 조용히 다짐한다.
정신 차려라.
여긴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