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분투
가족에게 외면당한 순간,
호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아니, 알릴 수가 없었다.
고향의 어머니께조차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가 사실을 털어놓은 건,
2년 뒤 ‘관해(寬解)’ 판정을 받고 난 후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혼자였다.
말 그대로 고군분투.
홀로 살아나야 하는 싸움의 시간.
항암치료 방법을 결정하기 위한 상담 날,
호태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암 진단을 받던 날 이미 자연 치유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퇴원하던 날, 그는 다짐했다.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겠다.”
그 다짐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신념의 선언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입맛을 잃고, 먹지 못한 몸이 스스로를 갉아먹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허망한 결말을 수없이 보아왔다.
호태는 자신에게 그런 선택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암 덩어리는 이미 떼어냈다.
검사 결과, 53개의 림프절 중 52개는 정상이었다.
단 하나의 림프절만이 전이가 의심됐을 뿐이다.
그는 그 하나의 림프절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믿었다.
인체는 스스로를 지키는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고 있다고.
암을 도려낸 이상,
이제 그의 몸은 위 절제를 제외하면 정상인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암이 다시 자라날 토양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
그래서 몸속의 장기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생명의 리듬을 되찾는다면,
암세포는 더 이상 어디에도 붙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살아날 것이다.
그 믿음이 곧 약이었고,
그 약은 어떤 처방전보다 강력했다.
살아나기 위한 대원칙
― 약이 아니라, 내 몸이 나를 구원한다 ―
그가 암에 걸린 원인은 자명했다.
연락 한 통을 기다리며 허공만 바라보던 무기력한 나날들.
불안이 일상처럼 깔려 있던 시간. 생활은 엉망이었다.
의식주가 모두 무너진 삶.
잠은 늘 찜질방에서 때우다시피 했고,
식사는 대충, 대부분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라면이었다.
생각해 보면,
병이 찾아오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그의 삶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생존의 대원칙을 세우다」
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호태는 ‘암’이라는 나그네와 공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얻은 결론은 명확했다.
병을 이긴다는 것은 약에 의존하는 일이 아니라
몸의 자연스러운 힘을 되찾는 일이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면역력의 회복.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 습관을 통해
몸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시 살아나기 위한 대원칙이었다.
그는 두 가지에 집중했다.
- 첫째, 체온을 올리는 것.
- 둘째, 장(腸) 건강을 회복하는 것.
「면역의 길」
체온 상승 ― 따뜻한 몸은 면역의 시작이다.
온열 매트를 샀다.
두 달 치 식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로서는 거금이었다.
몸속 깊은 장기까지 열을 스며들게 한다는 설명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에게 온열 매트는 지푸라기였다.
거금을 들인 만큼 본전을 뽑아야 했다.
한 번에 한 시간 반씩 땀을 흘렸다.
엎드려서 한 시간, 누워서 삼십 분.
매트 위에 깐 수건이 흥건해질 때까지.
몸을 지진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장기가 익는 듯한 열기.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땀은 마치 병이 빠져나가는 통로 같았다.
한겨울에도 그는 온·냉 샤워를 거르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을 마셨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조금씩, 몸의 온기가 살아났다.
그는 믿었다.
“몸이 따뜻하면, 암세포는 스스로 떠난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그 믿음이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를 살려내는 주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매일 밤,
땀에 젖은 수건을 짜내며 그는 중얼거렸다.
“암세포가 내게서 떠나갈 날이 멀지 않았다.”
장건강 회복 - 면역의 70%는 장에서 비롯된다
장은 몸속의 또 다른 우주였다.
면역의 70%가 그곳에 머물렀다.
장 건강의 핵심은 장내 미생물의 균형 유지에 있다.
균형을 이루는 길은 단순하다.
유익균의 먹이를 충분히 섭취하고, 유해균의 증식을 차단하는 것.
장내 미생물의 균형이 무너지면 몸 전체가 흔들렸다.
그는 유해균의 증식을 막기 위해 항생제를 멀리하고,
가공식품과 인스턴트를 끊었다.
대신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골랐다.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와 발효식품을 꾸준히 섭취했다.
그것들이 유익균의 밥이 되어 장 속의 평형을 되살려 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었다.
불안이 쌓이면 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알았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장도 병들고,
장이 편안해야 마음도 고요해진다는 것을.
다만,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만큼은 끝내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다.
「식습관의 전환」
몸이 고개를 끄덕이는 식사
그는 섭생의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 첫째. 해로운 것은 피하고, 이로운 것을 섭취할 것.
- 둘째. 영양의 균형과 장의 회복을 중시할 것.
- 셋째.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만 먹을 것.
몸이 고개를 끄덕이면 삼켰고,
몸이 고개를 저으면 뱉어냈다.
그의 식단은 지극히 평범했다. 거창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현미밥, 사과, 고구마, 미역, 견과 1종과 베리 한 가지를 기본으로
식이섬유가 많고 흡수가 잘되는 식재료로
직접 조리한 음식만 섭취했다.
그리고 뼈 건강을 위해
질 좋은 멸치를 감식초에 살짝 적셔 무산 김에 싸 먹는 습관.
그는 그것을 ‘나를 위한 작은 호사’라 불렀다.
중요한 것은 음식의 종류가 아니라 지속성이었다.
그는 음식으로 자신의 몸에 맞는 항암 성분을 매일 빠짐없이 섭취했고,
몸이 회복을 기억하도록 가르쳤다.
「생활습관의 변화」
몸과 마음의 리듬을 다시 세우다.
몸을 고치는 일은 식습관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이제는 생활의 리듬까지 바로잡아야 했다.
그의 생활 원칙은 단순했다.
“교감선생은 멀리하고, 부교감 선생과 친해질 것.”
긴장보다 이완을, 경쟁보다 휴식을 택했다.
아침엔 따뜻한 물로 하루를 열고 저녁엔 반신욕을 하며 하루를 닫았다.
차가운 음식과 차가운 마음을 멀리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햇살 속을 부지런히 걸었다.
충분한 수면, 규칙적인 일상,
명상과 감사의 습관이 그의 하루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몸은 서서히 회복되고, 마음은 다시 고요를 배웠다.
삶의 리듬이 제자리를 찾자
면역도 덩달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감사와 믿음」
마지막 남은 약은 감사와 믿음이었다.
그는 알았다.
감사는 최고의 면역제이고,
믿음은 최고의 약이라는 것을.
「자가 진단 4 항목」
병원에 가지 않기로 작정한 이상,
정기 검진을 대신할 수단이 필요했다.
자신이 세운 생존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진단 장비의 수치가 아니어도 안심할 근거가 있어야 했다.
그는 스스로의 몸을 관찰하기로 했다.
관찰의 대상은 네 가지 —
체온, 체중, 대변의 색, 그리고 혀의 빛깔.
이른바 자가진단 4 항목이었다.
그는 미세한 변화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숫자와 색, 온도와 감촉의 변화를 매일 읽어냈다.
다행히도 그 어떤 계측기의 수치도, 몸의 신호도
한 번도 그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스스로 세운 원칙이 옳았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조용한 반증이었다.
몸의 면역체계는 그의 의지와 결행에 정확히 응답했다.
체온은 서서히 올랐고, 몸무게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대변의 색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고, 혀의 설태는 점점 옅어졌다.
이윽고 환희의 순간이 찾아왔다.
「쾌변의 환희」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만, 쾌변은 환자를 춤추게 한다.'
쾌변의 아침!
그날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현미차 한 잔으로 위를 깨웠다.
그리고 조용히 변기 위에 앉았다.
순식간이었다.
아무런 힘도 주지 않았는데,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는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이 어찌 된 일인가 — 소동은 하지 않았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하던 순간임을 직감하고
그는 천천히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황금색. 누런 황금빛 변.
건강한 장이 만들어낸 완벽한 색이었다.
그는 변기 위에서 세상을 얻은 사람처럼 웃었다.
웃음 속에서 가늘게 터져 나온 한마디.
“해냈구나…”
그 웃음소리에는 안도, 기쁨, 그리고 살아 있음의 환희가 섞여 있었다.
김은숙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어려운 걸 호태는 또 해냈다.”
그는 당장 사회관계망의 아이디를 바꿨다.
‘짜라투! 황금 똥을 싸는 사나이’
그가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 -
그리고 또 하나,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온전히 치유에 전념할 수 있는 삶의 여건.
하지만 그 삶의 여건은 누가 마련해 준 선물이 아니었다.
살아나기 위해,
그가 발버둥을 치며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반지하 원룸의 좁고 어두운 공간,
빠듯한 주머니 사정 속에서 짜낸 최저 생존 식단.
하루 여섯 끼 넘게 직접 조리해야 하는 불편함.
느닷없이 찾아오는 덤핑 현상의 고통을 참아내야 했던 나날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가 꺾이지 않았던 힘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을 떠올리는 마음에서 왔다.
그 생각이 곧 격려였다.
「의지, 그리고 결행을 북돋는 그 어떤 열쇠」
- 살아나겠다는 의지를 꺾이지 않게 하는 힘 -
호태는 알았다.
의지가 무너지면 어떤 원칙도, 어떤 약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의지를 다진다. 잠시 결행도 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결심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다.
나태가 스며들고,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느슨해진 결기를 다시 세워 줄 ‘즉효 약’이 필요한 것이다.
하늘의 축복이었을까.
호태는 마침내 그 즉효 약이 될 ‘결정적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보라매 공원 다시, 그곳에」
퇴원 후 보름쯤 지났을 때
호태는 다시 보라매공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트랙 위를 뛰는 사람,
걷는 사람,
널찍한 공터에서 단체로 체조하거나 율동을 하는 사람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달렸던 100미터 직선 트랙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그날로부터 아마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다시 이곳에서 뛸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때 가슴속에서 되뇌었던 물음이
새벽의 찬 공기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났다.
호태는 천천히 신발 끈을 조여 매며 생각했다.
‘그래. 어디… 오늘 한 번 뛰어볼까.’
전력질주는 아직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해볼 만하다.
몸이 버텨줄지 아닐지는 뛰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그때였다.
직선 트랙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호태의 눈에 낯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덜 나이 든 노인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노파를 부축하며 트랙을 걷고 있었다.
분속 12미터.
달팽이보다 느린 걸음.
그러나 멈춤이 없는 걸음.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마땅할 노파가
한 뼘씩 내딛는 발걸음.
경이로웠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생존의 행진이었다.
노년의 품격을 위해 벌이는 필사의 몸부림.
그 걸음은 한마디 말도 없이 호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살아라.”
그 순간,
기적처럼
노파의 굽은 어깨너머로 태양이 떠올랐다.
아침의 첫 빛이 트랙을 따라 흐르며 호태의 얼굴에 닿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분명했다.
희망이었다.
외롭고 지쳤을 때나, 치유의 의지가 약해졌을 때마다
언제나 호태를 일으켜 세운 것은
그날의 노파와 그 뒤에 떠오르던 태양이었다.
그래, 다시 살자.
멈추지 말고.
오늘도 한 뼘씩,
다시 살아내자.
「그럼에도. 떠나야 하는 이유」
서울이 안 되는 이유, 하나_공기
그해 5월의 서울은 유난히 뜨거웠다.
소나기가 막 그친 오후,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열기.
그 속에는 미세먼지와 매연,
그리고 자동차 타이어 가루가 뒤섞여 있었다.
희뿌연 안개인 줄 알았던 공기 속엔
시커먼 알갱이들이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던 것이다.
호태는 그 자리에서 호흡을 멈췄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그것들이 코와 입, 폐 속으로 스며드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도시의 공기는
생명을 되살리기엔 너무 탁했다.
살기 위해서는 떠나야 했다.
서울이 안 되는 이, 둘_사람
서울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이었다.
스트레스는 모든 생존 원칙을 짓밟아 버리는, 폭군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간관계의 단절 없이 완전한 스트레스 해소란 불가능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아니 아는 사람과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곳.
호태는 짐을 꾸렸다.
그의 떠남은 퇴각이 아니라 진군이었다.
그의 마음속 나침반은 이미 고흥을 가리키고 있었다.
6월 12일.
보라매공원의 아침 햇살을 뒤로한 채,
호태는 그렇게 서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