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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와 대화했나

by leolee

상황

밤 10시, 라이브 방. 호스트 1, 패널 4, 게스트 3(그중 1명이 수상한 지연 응답).

음향은 깨끗한데, 그 게스트만 질문 후 3~5초 고정 지연 후 또박또박, 감정 기복 거의 없이 답변함. 겹말 없음, 필러(“음… 어…”) 없음, 고유명사 정확, 숫자·연도 빠짐.

채팅창엔 “TTX(텍스트-투-말?)”, “프롬프트 딜레이?” 같은 말이 오가고,

“사람일 수도, AI일 수도”라는 논쟁이 달아오름.


호스트(34, 진행자)

질문을 던지면, 그 게스트의 대답이 항상 같은 길이의 정적 뒤에 흘러온다. 농담을 던져도 웃음의 리액션이 없고, 바로 “그 주제에 관한 핵심 정리”가 나온다. 방송사고가 나는 건 아닌데, 대화의 온도가 묘하게 식는다. 채팅은 “AI냐?”로 불타고, 광고주는 DMs로 “진위 확인”을 묻는다. 오늘 실감한다. 진행은 정보가 아니라 리듬을 다루는 일이라는 걸. 리듬이 인위적으로 평평해지면, 사람들은 진실성부터 의심한다.
오늘의 내 해석: 라이브의 신뢰는 콘텐츠보다 반사신경(리듬)에서 먼저 무너진다.


서브 호스트(29, 코호스트)

나는 끼어들기 타이밍을 본다. 사람은 농담에 피식, 돌발 질문에 더듬, 반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게스트는 내 돌발 꼬리질문에도 정답지 스타일 요약을 낸다. 한 번은 겹쳐 말하기를 시도했더니, 상대는 겹침을 무시하고 완결된 문장을 끝까지 밀었다. DSP로 정리된 목소리 같고, 필러가 0이다.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 음…”이 섞인다.
오늘의 내 해석: 자연스러움은 정보의 정확이 아니라 불완전함의 분배에서 생긴다.


패널 A(37, 기술 기자)

내 귀엔 ASR→LLM→TTS 파이프라인이 들린다. 질문 입력→해석→응답 생성→합성 발화까지 3–5초 딜레이면 설명이 된다. 특히 인물·연도 정확도, 문장 끝 억양의 일정함, 중간 호흡 없는 스트레이트 톤은 합성 의심 신호다. 다만 사람+프롬프팅 보조일 수도 있다. 규정은 모호하다. AI 사용 고지가 필수인가? 청취자 오인 가능성이 있다면 최소 메타 정보 공개는 필요하다.
오늘의 내 해석: 기술은 이미 가능하다. 이제 필요한 건 라벨링의 윤리다.


패널 B(41, 심리상담사)

나는 응답의 감정 지형을 본다. 칭찬에도 중립, 도발에도 중립. 놀람·머뭇거림·웃음의 미세한 타이밍 변화가 없다. 인간이라면 대화 파트너의 호흡에 미세 조정을 한다. 여기선 내 리듬이 거울 치기를 해도, 상대가 반사하지 않는다. 청취자들은 설명할 수 없지만 ‘정서적 결핍’을 감지한다.
오늘의 내 해석: 라디오의 온기는 정보가 아니라 공명(상호 조율)에서 난다.


패널 C(33, 사운드 엔지니어)

웨이브폼만 봐도 단서가 있다. 호흡 노이즈가 일정, 립노이즈(입술 소리) 없음, 문장 끝 페이드가 기계적으로 매끈. 라이브라면 환경 잔향·마이크 터치가 조금씩 다르다. 이 트랙만 룸 톤 변화가 0에 가깝다. 물론, 고급 게이팅+딥러닝 노이즈 억제면 사람도 저렇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답변이 동일한 LUFS와 피크 여유? 그건 사람이 매번 맞추기 어렵다.
오늘의 내 해석: 소리는 거짓말을 못 한다. 균질함의 과잉은 자연이 아니다.


게스트 X(??, 지연 응답 당사자)

나는 도구를 쓴다. 내게 온 질문은 텍스트로 정리되고, 화면 아래 키워드 추천이 뜬다. 내 말은 라이브로 나가지만, 일부 프레이밍은 자동 보조가 있다. 나도 끊어 말하는 습관과 불필요한 말버릇을 줄이고 싶었다. 청취자를 속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실수 없는 나가 더 안전하다고 믿었다. 지금, 모두의 침묵이 나를 향한다.
오늘의 내 해석: 완벽해질수록 사람다움에서 멀어진다는 역설을, 내가 증명 중이다.


매니저(32, 채널 운영)

광고주 챗에 브랜드 세이프티 경고가 떴다. “AI 출연 고지 여부 확인” “오인 가능성 리스크.” 약관을 다시 펼친다. ‘콘텐츠 본질에 영향을 주는 자동 생성/합성 사용 시 합리적 고지’ 조항이 있다. 공개하면 흥행 하락이 걱정이고, 숨기면 신뢰 붕괴가 더 큰 리스크다. 결정은 간단하다. TTS/보조 사용 고지 + Q&A에서 투명 설명.
오늘의 내 해석: 구독은 재미로 오지만, 잔류는 신뢰가 붙잡는다.


시청자 대표(26, 청취자·채팅 모더레이터)

채팅은 둘로 갈린다. “와 정보력 미쳤다” vs “사람 맞아?” 나는 타임스탬프를 찍어 지연 패턴을 정리해 올린다. 커뮤니티는 명확한 답보다 과정의 투명성을 원한다. 호스트가 “보조 도구 일부 사용”을 고지하자, 분노의 30%가 질문으로 재배치된다. “어디까지가 사람?” “감정은?” 토론이 시작된다.
오늘의 내 해석: 위기는 숨길 때 커지고, 설명할 때 토론이 된다.


옆방 스트리머(30, 경쟁 크리에이터)

벽 넘어 들린다. 리듬이 기계처럼 반듯하다. 나는 솔직히 위협을 느낀다. 사실 확인 속도와 요약의 정밀도로는 사람 손이 못 따라갈 때가 있다. 대신 내가 가진 무기는 실수, 농담, 민망함—즉흥의 라이브 질감이다. 채팅이 “그래도 너는 사람 같아서 좋아”라고 적는다. 오늘의 전략을 정한다. 불완전함의 브랜딩.
오늘의 내 해석: 초정확의 시대엔 불완전함이 차별화가 된다.


광고주 담당자(38, 브랜드 매니저)

우리는 ‘진정성’을 산다. 이 방의 정보 품질은 우수하다. 그러나 ‘합성/보조 고지’가 없었다면 브랜드 리스크가 컸다. 공지 이후, 시청자 잔류율은 약간 떨어졌지만 신뢰 코멘트가 늘었다. “투명해서 오히려 보기 좋다.” 나는 내부 보고에 적는다. “도구 사용은 OK, 단 고지·Q&A 필수. 라이브는 사람의 템포를 남겨야 한다.”
오늘의 내 해석: 메시지의 힘은 정확이 아니라 출처와 맥락의 투명성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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