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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무역회사 — 환율이 바꿔 놓은 온도

by leolee

연말 저녁, 무역회사 사무실


로비 전광판에 USD/KRW 1,4xx 숫자 계속 반짝임.

회의실 유리벽에 선물환 만기(3M·6M·9M) 도식 마커로 그려진 채 남아 있음.

재무팀 자리엔 현금흐름 스프레드시트와 은행 라인 표가 나란히 열려 있음.

영업 구역 칸막이에 “소량·다빈도 선적” 메모 포스트잇 붙어 있음.

구매팀 책상 위 컨테이너 분할 그림(1.0→0.6+0.4) 낙서 메모 보임.

물류팀 대시보드에 ETA 신뢰도 0.8x→0.9x 화살표 애니메이션 돌아감.

복도 화이트보드에 “현금 보유 일수” 자석 숫자 전일 대비 –1로 교체됨.

슬랙 화면에 #fx-qa-open 채널 알림 연속으로 뜸(읽지 않음 수 증가).

프린터 앞에 감도표 재출력 대기 줄 짧게 형성.

출입구 테이블에 거래은행 RM 명함과 제안서 두 권 놓여 있음.




장하윤(52, 대표이사)


출근하자마자 먼저 현금흐름표부터 열었다. 매출총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낫다는 보고가 올라와도, 내 눈은 운전자본 회전일수와 달러 결제 캘린더로 간다. 12월은 회계상 예쁘게 보이기 쉬운 달이다. 그러나 ‘예쁨’은 세금과 이자, 급여와 협력사 어음이 지나가며 실금이 난다. 오전 이사회에서 영업은 “수출 호가 유지”를, 구매는 “수입 결제 가속 중단”을 외친다. 둘 다 맞다. 그래서 현금 우선 원칙으로 정리한다. ① 환헤지 만기 분산(3·6·9개월) ② 재고 턴 목표 상향(평균 42일→35일) ③ 단기 CP는 최소, 대신 은행 라인을 자주 열고 닫아 신뢰 빈도를 높인다. 저녁에 층을 돌며 각 팀 칸막이에 잠깐씩 서서 묻는다.

“지금 당장 당신이 막고 싶은 최악의 경우는 뭔가요?”

답을 들으면, 메모에 비용보다 시간을 먼저 적는다. 이 회사가 내일도 문을 열려면,

오늘은 버틸 시간을 사야 한다.


오늘의 내 해석

기업은 이익으로 살아도 현금으로 숨 쉰다—변동성일수록 시간을 먼저 산다.




백주원(48, CFO)


점심을 건너뛰고 헤지 포지션 대시보드를 다시 깔았다. 선물환, NDF, 콜/풋 옵션, 스왑. 초기 가정(USD/KRW 1,350±)이 무너진 뒤, 일부 포지션은 미스매치 손익이 튄다. ‘틀렸다’고 자책하면 는다. 숫자는 수정으로만 움직인다. 은행 RM과 통화스왑 테너를 늘리는 대신, 프리미엄이 비싼 구간은 네이키드로 남겨 자연헤지로 흡수한다. 자금팀엔 DPO(지급기일)를 5일만 늘리는 방안을 요청했고, 영업팀엔 DSO(회수일) 단축 인센티브를 쏘았다. 회의실에서 임원들이 “그래도 연말 실적 가이던스는?”을 묻는다. 나는 모니터를 돌려 현금 예측 시나리오 3개를 보여준다. “가이던스보다 생존 스케줄부터 보시죠.” 방이 잠깐 조용해진다.

오늘의 내 해석

환율은 맞히는 게임이 아니다—만기 분산과 현금 쿠션이 유일한 해답이다.




임세호(44, 리스크관리/자금팀장)


사내 슬랙에 “환율 FAQ”를 올렸다. 질문은 늘 같다—“지금 사요, 팔아요?” 내 답은 늘 길다. 익스포저의 성격(수입/수출), 만기, 원가 구조가 다르면 같은 환율도 다른 날씨다. 오후 브리핑에서 감도표를 띄웠다. “여기, 환율 +10원에 총이익은 이렇게, 현금은 이렇게.” 숫자가 이해되자, 영업은 할인 대신 조건을 제안하기 시작했고, 구매는 ‘싸게’보다 ‘덜 묶기’로 전환했다. 내 책상 위에는 최악의 날 체크리스트가 있다. (1) 은행 라인 가용액 (2) 결제 5대 거래처 우선순위 (3) 대체 통화 인보이스 협상 가망성. 최악을 준비하면,

이상하게 실제 하루는 덜 최악이 된다.


오늘의 내 해석

리스크의 절반은 숫자, 나머지 절반은 설명으로 줄인다.




최서준(41, 수출영업 팀장)


올해 가장 많이 쓴 문장: “짧게 약속하자.” 바이어는 단가 인하가 아니라 확신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분기 계약 대신 월별 스케줄로 쪼개고, 선적은 ‘주 2회 → 3회’로 나눴다. 낮엔 독일 고객에게 선지급 10% + 기존가 유지를, 밤엔 미주 고객에게 분할 선적 시 리베이트를 제시했다. 모두가 “마진이 줄지 않느냐” 묻지만, 진짜 마진을 갉아먹는 건 취소다. 팀원들이 메일을 “보내기” 누르기 직전 멈칫하면, 나는 대신 전화를 건다.

목소리는 ERP에 기록되지 않지만,

신뢰를 다루는 속도는 메일보다 빠르다.

오늘의 내 해석

환율 장세의 영업은 볼륨 싸움이 아니다—선적의 리듬과 확신의 속도다.




이소은(38, 구매/소싱 매니저)


오늘만 세 번, 공급사가 “TT in advance(즉시결제)”를 요구했다. 우리도 아프다. 그래서 선적 분할을 카드를 꺼냈다. 컨테이너 1→0.6+0.4, 결제도 50% 선지급+50% 도착 후 7일. 창고팀과 재고 턴을 초 단위로 맞추며, “창고는 현금이 앉아 있는 자리”라는 말의 무게를 새긴다. 원가표를 다시 짜 보니 환율 1,430↔1,470 사이에서 비익이 사라지는 구간이 명확하다. 이 구간에 들어가면 물량을 줄이고 계약 기간을 줄인다.

나쁜 소식은 빨리, 좋은 소식은 크게

오늘도 세 통의 “조건 변경 공지”를 먼저 보냈다.

오늘의 내 해석

비싼 달러 시대의 소싱은 싸게 사는 기술이 아니라 덜 묶는 기술이다.




정태호(45, 물류/포워딩 총괄)


항만이 막히면, 회사 전체가 뒤로 미끄러진다. 컨테이너 두 개가 롤오버 되면서 선사 할증이 붙었다. 환율이 뛰면 선·내륙 운송사도 요율을 재협상한다. 나는 선적을 “한 번 크게”에서 “여러 번 얕게”로 바꾸고, 라스트마일은 가변 요율로 개편했다. 물류 대시보드에 ETA 신뢰도 지수를 붙여 영업에게 공유했다. “이번 주 0.83, 다음 주 0.91.” 숫자로 말하면 불만이 전략으로 바뀐다.

오늘 한 가장 중요한 일은, 클레임 대응 프로세스를 전사 메일로 그림으로 보내 준 것.

그림이 들어가면 책임 소재가 덜 싸운다.

오늘의 내 해석

변동성에 완벽한 길은 없다—우회로를 더 만들어 두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윤다현(33, 해외영업 주임)


단가 메일을 쓰다, 세 번째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혹시 이 메일이 거래를 끊을까 봐.’ 그래서 할인 대신 조건을 썼다. “선지급 10% 시 기존가, 분할 선적 시 리베이트, 환율 1,4XX 상단 돌파 시 재협상.” 보내기 전에 팀장에게 보냈더니 돌아온 말: “좋아, 짧고 명확하다.” 답장은 느리다. 그리고 솔직하다. “우리도 힘들다.” 모니터를 닫고 깊게 숨을 들이쉰다. 재촉하지 않는 영업—내가 올해 가장 늦게 배운 기술이다.

퇴근길에 휴대폰을 다시 켠다. 바이어가 “조건안 수락, 소량부터”라고 보냈다.

혼잣말로 “고마워요”가 나왔다.

오늘의 내 해석

환율보다 빠른 건 불안이다—그래서 느리게 설득하는 힘이 경쟁력이다.




고민재(29, 주니어 애널리스트)


내 하루는 민감도 차트로 시작해 스파이더·워터폴·히트맵으로 끝난다. 숫자를 예쁘게 그리는 게 목적이 아니다. 모두가 같은 풍경을 보게 만드는 게 목표다. USD/KRW 10원 변동 때 매출총이익·재고평가·운전자본 변화를 한 화면에 올려 임원 메일에 붙였다. 파이낸스는 “헤지 더”, 영업은 “버텨”, 구매는 “덜 묶어”—말이 다를 때, 차트는 서로의 언어를 번역한다. 야근이 길어도,

내일 회의 시간이 20분 줄 걸 알기에

타이핑을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내 해석

좋은 분석은 예측이 아니라 대화 시간을 줄이는 도표다.




한지용(40, HR/조직문화)


점심 이후 공기가 신경질로 변했다. 파이낸스는 영업을, 영업은 구매를, 구매는 물류를 탓한다. 그래서 슬랙에 “환율 Q&A 오픈 채널”을 만들고 룰을 세웠다. 비판 금지, 데이터·사례만. 저녁엔 30분 환율 브리핑 라이브를 열어 외부 강연자 없이 사내 리스크팀과 용어 통일만 했다. ‘선물환·NDF·내추럴 헤지’를 같은 한국어로 맞추니, 채팅창의 감탄사가 줄고 질문의 밀도가 올라간다. 야근 택시 쿠폰을 풀며,

나는 메시지에 “오늘의 배움: 서로의 자리에서 어떤 숫자를 보는지”를 적었다.

복지보다 강한 건 맥락 공유다.


오늘의 내 해석

나쁜 분위기는 비용이 아니라 소통 결핍에서 시작한다—공유는 복지보다 강하다.




이상우(47, 거래은행 RM·사무실 방문)


오늘은 먼저 들렀다. 문 앞에서 공기부터 읽는다. ‘현금이 말라간다’는 냄새가 날 때가 있다. CFO에게 두 장의 페이퍼를 놓았다. ① 선물환 라인 증액(분할 만기·옵션 혼합) ② 단기 운전자금(부분만기 분할 상환). 금리는 낮춰 달라는 말보다, 정보 빈도를 높여 달라 요청했다. “우린 숫자로만 거래하면 망합니다. 주 2회 현금 캘린더를 저한테도 공유해 주세요.” 돌아서며 말한다. “지금은 금리 10bp보다 전화 한 통이 더 쌉니다.”

은행 입장도 똑같다.

버틸 수 있는 회사와만 남는다.


오늘의 내 해석

금융은 돈의 가격이 아니라 신뢰의 빈도가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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