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간 휴가를 받은 나는 집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세라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오빠, 우리 여행 가자.”
“여행?”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응, 중국에 이렇게 오래 있었으면서 칭다오 밖으로는 안 나가봤잖아. 좀 새로운 곳을 가보자고. 생각도 좀 비울 겸.”
세라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래, 어디로 갈 건데? 네가 한 번 정해봐.”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상하이 어때? 내가 가본 도시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볼 것도 많아. 게다가 오빠가 중국에 오기로 결심했던 도시라며?”
나는 그 말에 잠시 상하이에 대한 기억에 잠겼다. 상하이는 내가 중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결심했던 곳이었다. 황포강의 야경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좋아. 오랜만에 상하이를 다시 가보자.”
여행 첫날, 우리는 상하이로 바로 가지 않고 근처 도시인 쑤저우를 들르기로 했다. 쑤저우는 '중국의 베니스'로 불리는 곳이었다. 수로를 따라 이어진 도시의 풍경은 마치 그림 같았다.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움직이며 주변의 전통 건축물과 홍등을 감상했다.
배 위에서 세라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 이거 진짜 예쁘지 않아? 여긴 언제 와도 좋아.”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풍경은 진짜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것 같아.”
우리는 카메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웃음을 나눴다. 세라는 연신 사진을 찍으며 SNS에 올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 풍경을 조용히 감상했다.
쑤저우의 또 다른 매력은 정원이었다. 우리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구청원을 방문했다. 섬세하게 꾸며진 정원 곳곳에는 작은 다리와 연못,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있었다. 세라는 정원의 한 구석에서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오빠, 여기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정원 같아. 예쁘지?”
“그래, 드라마보다 훨씬 실감 나네.”
쑤저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는 실크 박물관이었다. 실크로 만든 이불과 옷들, 그리고 섬세한 자수 작품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이게 다 실크로 만든 거라고? 진짜 대단하다,”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세라는 손가락으로 작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다 쑤저우에서 시작된 거야. 그래서 여길 실크의 도시라고 부르는 거지.”
쑤저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상하이로 출발했다. 쑤저우의 고즈넉한 물길이 잔잔한 마음을 안겨줬다면, 상하이의 빛나는 불빛은 그 자체로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가는 도중에 붐비는 도시의 불빛이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고, 세라는 옆에서 상하이의 야경을 보며 설렘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여긴 진짜 다르다. 칭다오랑은 완전 느낌이 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곳은 진짜 중국에서도 독보적인 도시니까. 그 황포강 야경을 보면 더 실감 날 거야.”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늦어서 모든 곳이 조용했다. 그런데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체크인 카운터로 다가가 이름을 확인한 후 예약 상황을 설명했다. 직원은 컴퓨터를 보며 잠시 확인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만, 외국인은 저희 호텔에서 숙박이 어렵습니다.”
나는 순간 당황하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분명히 예약하면서 외국인도 함께 간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세라는 옆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직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럼 왜 전화로 된다고 했어요? 지금 와서 안 된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직원은 여전히 사과하는 태도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화 예약 때 잘못 전달된 것 같습니다. 규정상 외국인은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규정이라뇨?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다른 곳에 예약했을 거 아니에요.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세라가 내 팔을 붙잡고 속삭였다.
“오빠, 진정해. 여기서 소리쳐봤자 해결 안 될 것 같아. 다른 데 알아보자.”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근처에 다른 호텔이라도 추천해 주세요.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곳으로요.”
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호텔 이름과 주소를 적어 건넸다.
“여기는 외국인 손님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우리는 짐을 다시 챙겨 호텔을 나섰다. 밤늦은 시간이었고, 택시를 잡아 추천받은 호텔로 향했다. 세라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빠, 상하이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여기가 얼마나 국제적인 도시인데.”
나는 세라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이런 일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자.”
우리가 도착한 두 번째 호텔은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로비에 들어서자 따뜻한 조명이 반겨주었고, 직원들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체크인 과정은 매끄럽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곧 방 열쇠를 받아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며 세라가 말했다.
“오빠,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중요한 건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거야.”
방에 들어서자 넓은 공간과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세라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상하이의 밤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불은 꺼진 야경이긴 했지만 빌딩들이 아름다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상하이의 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꺼진 가운데에서도 간간이 보이는 네온사인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도시의 파노라마는 이곳이 왜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했다.
“오빠, 여기서 보는 상하이 진짜 멋있다. 결국 잘 풀렸네.” 세라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응, 다행이야.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는데 이제야 좀 편히 쉴 수 있겠다.”
세라는 침대 옆에 앉으며 내 손을 잡았다.
“오빠, 그래도 화 안 났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화가 나긴 했지만, 너랑 같이 있어서 그게 다 괜찮아졌어. 여행이라는 게 원래 이런 예상치 못한 일들로 기억에 남는 거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맞아. 오늘은 정말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 같아.”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다음 날의 상하이 일정을 준비했다. 예상치 못한 갈등과 불편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도 우리 여행의 한 부분이 되었고, 서로를 더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날, 우리는 난징루로 향했다. 상하이의 번화가인 난징루는 다양한 상점과 맛집들로 가득했다. 세라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즐거워했다.
“오빠, 여기 진짜 대단하지 않아? 뭐든 다 있네.”
한참을 걷다가 다리가 좀 피곤해서 근처 벤치에 앉았는데, 세라가 내 무릎을 베고 눈을 좀 부쳤다.
우리는 바로 난징동루 근처에 위치한 라이라이샤오롱으로 향했다. 상하이의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은 이미 입구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인기 맛집임을 알 수 있었다.
“세라, 여기 줄 대단하다.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세라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오빠, 맛집은 기다릴 줄 알아야지. 그리고 이런 데는 기다릴수록 기대감이 커져서 더 맛있게 느껴진다니까.”
우리는 30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가게 내부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코끝을 자극하는 것은 고소하면서도 진한 육즙 향이었다. 내부는 현대적이었다.
복층식으로 되어있었고 복층 아래에는 오픈 주방이 보였는데, 요리사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만두피를 빚고 있었다. 얇고 투명한 피 위에 정성스럽게 소를 채우고 꼬집어 마무리하는 모습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듯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나무 찜통이 주방 곳곳에 쌓여 있었고, 찜통에서 올라오는 증기가 주방을 감싸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음식이 나온 손님들이 샤오롱바오를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만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터지지 않도록 신중히 한입 베어 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육즙에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벽 쪽에는 세라가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오빠, 저기 보이는 메뉴판 봐. 신기하게 생겼어.”
메뉴판은 나무 팻말처럼 생겼다. 메뉴를 보다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게살 샤오롱바오와 훈툰사진이 특히 눈에 띄었다. 한편, 미슐랭 맛집이라고 해서 굉장히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른 초라한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서빙을 하는 직원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찜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그때마다 김이 피어오르며 고소한 냄새가 온 가게를 가득 채웠다. 손님들은 나무 찜통 뚜껑을 열며 서로 탄성을 내질렀다.
“오빠, 여기 진짜 분위기 좋지 않아?” 세라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상하이 온 느낌이 확 난다. 이게 바로 여행의 맛인가 봐.”
주문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대나무 찜통이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오빠, 이게 샤오롱바오야. 조심해야 돼. 안에 육즙이 뜨겁거든.”
나는 젓가락으로 한 입 크기의 샤오롱바오를 집어 들었다. 얇고 반투명한 만두피 안에는 진한 육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라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먼저 윗부분을 살짝 찢어서 육즙을 마셔봐. 그러고 나서 만두를 먹으면 돼.”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만두피의 윗부분을 깨물자 육즙이 쏟아지며 혀 끝에 퍼지는 진한 감칠맛이 마치 오래된 고급스러운 육수 같았다. 동시에 뜨겁지만 고소한 국물이 입안을 감싸며 퍼졌다. 그리고 게살 특유의 달콤함이 육즙과 어우러져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와, 이거 대단하다.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는데?" 세라는 젓가락으로 훈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훈툰이야. 샤오롱바오랑은 다르게 국처럼 먹을 수 있어.”
나는 훈툰의 국물을 숟가락에 올리고 입에 넣었다. 국물은 샤오롱바오와는 다른 맛이었다.
“와, 이건 국물만으로도 대박이다. 국물이 이렇게 풍부하고 맛있을 수 있나?”
세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상하이 사람들은 이걸로 간단한 한 끼를 해결하기도 해. 든든하거든.”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며 나는 세라에게 말했다.
“상하이에 와서 샤오롱바오를 먹은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세라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이래서 내가 오빠 데리고 여행 다녀야 한다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이런 맛집도 못 와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