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과학철학자 쿤(Thomas S. Kuhn, 1922~1996)은 1962년에 저술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책에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벼락에 관한 실험을 전기(電氣) 이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과학혁명의 한 예로 들면서 그 유명한 패러다임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하버드(Harvard)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다가 과학사 연구로 전향한 쿤은 인문학 및 사회학 관련 학자들과 잦은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문제를 다루는 방법론의 본질에 대한 공공연한 논란이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자연과학자들은 근본 문제에 대한 논란은 거의 벌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점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연구한 결과, 어떤 한 시대에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보편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성과를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 논란이 대체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보편적으로 인정된 성과를 그는 패러다임이라고 명명하였다.
하나의 과학적인 패러다임은 확실하고 영구적일까?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 과학철학자 쿤은 과학의 발달이 수 세기에 걸친 과학자들의 연구업적이 쌓인 결과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 일어난 획기적인 과학혁명의 결과라는 이론을 수립하였다. 쿤은 과학 발전의 역사를 ‘패러다임(A)에 의한 과학혁명 → 패러다임에 기초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수립 → 변칙의 출현과 정상과학의 위기 → 새로운 패러다임(A’)에 의한 과학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과학이란 원래는 자연과학을 의미했는데, 후세사람들은 인문과학, 사회과학에도 그의 이론을 적용하여 패러다임의 변혁(paradigm shift)이란 용어를 광범위하게 쓰고 있다.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 분야의 기초적인 이론, 법칙, 지식, 사례, 세계관, 공통된 습관 등등 어떤 시기에 어떤 과학자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전제를 의미한다. 이런 패러다임에 이의가 없이 과학자 전원이 이를 공유하는 시기의 과학을 ’ 정상과학‘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과학 활동은 ’ 수수께끼 풀기‘를 하는 것이고, 패러다임의 확장과 보완이 주요 연구과제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으로 풀 수 없는 변칙 현상이 발견되면 과학자 집단 내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그 집단은 분열되고 고통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곧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대변혁으로 연결되는데 이를 패러다임 변화 혹은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기존 정상과학의 추종자가 볼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고, 앞뒤 두 개의 패러다임은 근본적인 출발점이 달라서, 비판도 거부도 불가능하고 오로지 개종(conversion)만이 있을 뿐이다. 아니면 기존 과학의 추종자가 죽어 없어져야만 그 충돌이 해결된다. 과학혁명 뒤에는 옛 패러다임은 파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에서 안정기인 새로운 정상과학이 뒤따르고 이러한 반복과정이 과학 발전의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패러다임의 변혁을 주도한 사람은 살아생전에 그 시대에서 천재로 추앙받거나 아니면 미치광이로 천대를 받게 된다. 천재로 대접받은 사람의 대표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을 들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스위스의 특허청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광전자 현상을 깔끔하게 설명하고 그 후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당대에 천재 물리학자로 취급을 받고 전후에는 미국에서 정중하게 모셔가서 말년을 순탄하게 보내다가 사망하였다.
한편 살아 있으면서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으나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미치광이 취급을 받은 대표적인 과학자로 볼츠만(Ludwig E. Boltzmann, 1844~1906)을 들 수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로서 거시적인 자연현상과 미시적인 입자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계역학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특히 열역학 제2 법칙에서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S)는 계의 거시 상태에 상응하는 미시 상태에서 가능한 분자의 배열 방법의 수(W)의 자연로그(log)에 비례한다는 S = k log W라는 당시로서는 황당한 관계식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k는 볼츠만 상수로써 기체상수를 R, 1 mol 중의 분자 수인 아보가드로수를 N이라 할 때, k = R/N이 되는데 이를 계산하면 k=1.38 × 10-23 J·K-1이 된다. 볼츠만은 열역학 제2 법칙의 비가역성을 역학의 입장에서 설명했고, 열역학 제2 법칙을 질서와 무질서도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엔트로피 개념을 통계역학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동료들은 그가 이룩한 업적을 부정하고 비판하였다. 볼츠만은 그런 자신의 업적이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계속 거부되는 고립감으로 인해 자살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Vienna), 어느 공원에 있는 그의 묘비(墓碑)에는 S = k log W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Paradigm이란 단어는 언어학의 문법 용어로써 ’ 품사의 어형 변화표’란 뜻이다. 예를 들어 라틴어에서 동사의 어미변화의 유형을 나타내는 [amo, amas, amat]가 하나의 paradigm이다. 이 유형에 따라 이 부류의 동사들은 어미변화를 한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은 정상과학에서 사람들이 논의의 근거로 삼는 틀(pattern) 또는 모범(model)이다. 문법에서는 paradigm에 따라 [laudo, laudas, laudat]처럼 그대로 모사(replication)하면 되지만, 과학에서는 하나의 패러다임은 단지 모사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법률용어로써 replication(재항변서)이 의미하듯이 새롭고 더 엄격한 조건 아래에서 명료화되고 구체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Paradigm이란 문법 용어가 쿤에 의해서 과학사 용어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의 이론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되면서 패러다임이란 용어가 각종 학문이나 일반 상식인의 일상생활에서 유행어처럼 쓰이게 되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울 때, 명사의 성이 남성, 여성, 중성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주격(는), 소유격(의), 여격(에게), 목적격(을) 등 격변화에 따라 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의 변화표를 외우던 기억이 난다. 남성명사는 der, des, dem, den, 여성명사는 die, der, der, die, 중성명사는 das, des, dem, das로 격변화한다고 기억된다. 동사 어미의 격변화는 잘 생각이 나지 않고 동사별로 과거형과 과거분사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암기한 기억이 난다. 20여 년 뒤에 필자는 프랑스 회사와 같이 일을 하며 프랑스 사람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프랑스어를 자습한 적이 있다. 이때 프랑스어에 명사가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됨을 알았는데 성이 없는 우리말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참 어렵게 느껴졌다. 이런 고충을 토로하는 필자에게 프랑스 회사 사람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명사의 성이 3개인 독일어에 비하면 프랑스어는 간단한 것이고 자기들은 어려서부터 입에 붙어서 복잡한 줄 모르겠다. 여성의 자궁에 있는 어떤 부위를 지칭하는 명사의 성이 남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정도까지 가면 의사라면 모를까 자기도 잘 모르겠다. 프랑스어에서는 동사의 어미변화가 복잡해서 말할 때는 대충 넘어가도 상대방이 알아듣는데, 문어로 쓸 때는 저술가들도 조심해서 쓴다고 한다. 자기도 편지를 쓸 때는 동사의 어미에 특히 조심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패러다임 변화와 유사한 용어로 killer application과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들 수 있다. Killer application은 증기기관, 금속활자, 자동차, 안경, 컴퓨터 등과 같이 시장에 나오자마자 산업을 변화시키고 시장을 재편해 경쟁 제품을 완전히 몰아낸 발명품이나 서비스를 통틀어 일컫는다. 미국의 주식 투자가들이 소프트웨어 '둠'이나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발명품들을 '킬러 애플리케이션'이라고 부르면서 명명되었다. 줄여서 '킬러 앱(killer app)'이라고도 한다. 원래 의도했던 사용 목적을 훨씬 뛰어넘어 사회를 변화시킬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혁신적인 상품이나 발명품은 시장에 등장하자마자 그 시대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도구인 등자(鐙子, stirrup)는 중세에 발명된 이후 전투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폭발적인 수요를 보이면서 말의 수요도 함께 늘려 결국은 초지(草地)의 공급이 말의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해 영주 계급이 쇠퇴하고 중세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킬러 앱'은 등자처럼 한 시대 또는 그 이상으로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발명품들로, 위에 예로 든 제품들 외에 컴퍼스, 나침반, 도르래, 전구, 텔레비전, 원자폭탄, 인터넷, 스마트폰 등이 있다. 최근의 사례로는 평판 디스플레이(flat panel display)의 등장으로 브라운관을 쓰는 전자총 텔레비전이 없어진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요즘에는 게임체인저(game changer)라는 표현도 사용되고 있다.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고객의 전통적인 기대와 전혀 다른 성능이나 저렴함, 편리함, 단순함 등의 이점(利點)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혁신이다. 경영 전략 용어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포드사의 모델 T 자동차가 꼽힌다. 자동차가 귀족이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 포드사는 표준화 공정을 도입함으로써 가격을 낮춰 모델 T를 출시했는데 이것은 일반 대중을 소비자로 만들어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와해성 혁신은 하위 시장(low end market) 전략이나 신시장(new market) 전략으로 그것을 실현한다. 하위 시장 전략은 현재 시장의 대표 제품의 성능보다 떨어지는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서 하위 시장에 자리 잡은 후 기술개발을 통해 상위시장의 욕구까지 점진적으로 만족시키려는 전략이다. 앞의 모델 T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이다. 신시장 전략은 가격이나 기술적 문제로 구매에 제약이 있는 잠재적 소비자를 대상으로 제품의 성능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내는 전략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고 한다. 반면에 존속성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은 기존 기술의 점진적 고도화를 통해 성능이 개선된 제품으로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