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산업혁명을 가져온 증기기관의 발달로 이루어진 기차와 전철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다 보니 대형 운송 수단에 치중한 감이 있다. 옛날에는 달구지, 마차, 인력거 등 개인 혹은 몇 사람의 이동 수단이 기본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개인용 교통수단을 동력화하기 위한 노력이 기차 못지않게 있었다. 증기기관을 개인용 차량에 적용하기에는 증기기관의 부피나 중량을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연기관이 발달하면서 엔진이 소형화되고 강력해지면서 휘발유나 디젤을 연료로 사용하는 엔진이 장착된 차량이 급격하게 보급되었다. 자동차는 영어로 automobile인데 영어권에서 motorcar 또는 car란 단어를 많이 써 왔다. 요즈음은 통신과 컴퓨터 기술의 발달과 함께 새롭게 mobile, mobility란 말이 자동차를 표현하는 말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자동차는 독일에서 제반 관련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그 기술력의 우수성으로 명성이 있지만, 자동차의 대중화에는 미국의 GM(General Motors)이나 포드(Ford) 회사의 대량생산기술과 마케팅 전략의 기여도가 크다. 이제는 일본과 한국의 자동차 생산기술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자동차 관련 기술이 발전되고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각국에서 도로 확충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기차는 반드시 철로를 부설해야 하고 전동차의 운행을 위해서는 전선을 철로 위에 부수적으로 연결해야 하는 큰 사업이어서 당연히 국가적인 과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의 건설이 필수적인 국가 과제가 되었다. 이를 국가의 인프라 구조(infrastructure)라고도 한다. 요즘은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비행기가 대세이지만 그전에는 고속도로와 철도 건설이 국가의 주요 과제였다. 많이 듣는 말로 미국의 국부는 고속도로이고, 일본의 국부는 철도라고 한다. 독일도 철로 못지않게 고속도로를 많이 건설하였다. 우리나라도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경부고속도로를 필두로 전국에 도로를 거미줄같이 구축하였다.
길 혹은 도로는 아주 옛날부터 국가의 기본 요소였다. 유럽 일부와 지중해 연안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세웠던 로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통치를 위해 각 지역에 육로를 건설하고 결국에는 모든 길을 로마로 연결하였다. 대표적으로 아피아 가도(via appia, Appian Way)라고 하는 유명한 도로를 닦았다. 고대 중국에서도 천하통일은 결국 수도와 각지를 잇는 도로의 건설로 완성되었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며 정체 없이 잘 다니도록 도로를 포장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다. 독일의 히틀러가 건설한 아우토반(Auto Bahn)이 오늘날 고속도로의 효시라고 보는데, 속도 제한의 상한선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착안하여 국토가 넓은 미국에서도 세계 2차 대전 이후에 고속도로(highway) 건설 붐이 일어 동서와 남북으로 고속도로를 거미줄처럼 닦아 놓았다. 1960년대까지 완성한 이 고속도로망이 미국의 큰 자산이 되었다. 이때 완성된 고속도로는 그 뒤 경제난과 비행기의 발달과 보급으로 더 확충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국 곳곳에 도로를 대규모로 닦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칭하여 신작로(新作路)라고 했다. 새로 만든 이 길은 사람과 우마가 다니던 종래의 길보다 넓고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었지만,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한국전쟁 중에 미국에 연수를 간 우리 젊은 장교들은 도로 중앙에 줄을 그어 자동차가 교행 하도록 한 포장도로를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경제부흥으로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서울에서는 기존 도로 넓히기와 포장 공사가 진행되었다. 자동차 교통에 방해되고 대중교통으로서의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전차 철로가 철거되고, 길 위에 자동차용 육교 도로가 건설되고, 횡단용 보행자 육교가 곳곳에 건설되었다. 남산과 북한산 밑으로는 터널이 건설되었다. 지금은 관악산 밑을 동서로 길게 굴을 뚫어 자동차 도로를 만들었다.
서울 시내의 교통망 못지않게 전국의 도로망 건설도 추진되었다. 독일의 아우토반이나 미국의 하이웨이를 염원하며, 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고속도로 건설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나 당시의 정치 및 재계 지도자들이 뚝심으로 밀어붙여 조기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마무리 지어 우리나라 경제개발을 톡톡히 견인하고 주민의 생활을 일신하였다. 머지않아 자동차 통행량이 늘어 경부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해지게 되자, 기존의 고속도로를 확장하는 공사를 해야 했으며, 다른 고속도로도 동서남북으로 거미줄처럼 건설되었다. 이렇게 도로뿐만 아니라 다리, 터널 공사 경험이 늘면서 관련 기술과 인프라가 축적되고 세계적인 건설회사들이 탄생하였다.
서울의 한가운데를 한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서울의 도심은 한강 이북에 집중되어 있었고 한강 이남에는 노량진, 영등포 정도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었고, 강서나 강남지역은 농촌이었다. 한강을 건너는 다리는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만 있었다. 인도교는 지금은 한강대교라 부르지만, 당시에는 자동차가 별로 없어서 사람과 우마차가 주로 건너 다니고, 한강 철교로는 기차와 전철이 통과하였다. 6·25 동란 때 이 다리의 폭파와 도강(渡江)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다가 김포공항이 비행기의 주 이착륙장이 되면서 여기에 접근을 쉽게 할 목적으로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가 1960년대에 건설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1970년대에는 고속도로에 연결되는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가 만들어지고 남산터널이 뚫리면서 서울 도심으로 바로 들어오는 길이 연결되었다.
지금은 팔당 댐 아래부터 일산에 이르기까지 30개가 넘는 다리가 한강 위에 놓여 있다. 한강 하류부터 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산대교, 김포대교, 신행주대교, 방화대교, 마곡철교(R), 가양대교, 성산대교, 월드컵대교, 양화대교, 당산철교(R), 서강대교, 마포대교, 원효대교, 한강철교(R), 한강대교, 동작대교(R), 반포대교(잠수교), 한남대교, 동호대교(R), 성수대교, 영동대교, 청담대교(R), 잠실대교, 잠실철교(R),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광진교, 구리암사대교, 강동대교, 팔당대교. 여기서 다리 이름 뒤의 R 표시는 전동차가 건너 다닐 수 있는 선로가 있는 다리이다. 자동차와 사람이 건너는 다리 이외에 전동차가 이용하는 한강 위의 철교와 한강 밑의 터널(서해선 한강터널, 5호선 여의터널, 분당선 터널, 5호선 광나루터널)도 10개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형 교통사고가 급증하여 고속도로에서 접근이 쉬운 지역에 병원이 세워지고 환자가 늘면서 병원이 대형화되었다. 여기에는 국민의료보험제도의 확충과 안정화가 큰 역할을 하였다.
서울에 지하철 공사가 처음으로 시행될 때는 기존의 도로에 철제 파일을 박고 상부에 복공판을 씌우고 흙을 파내고 터널을 만들어 철로를 까는 방법을 썼다. 공사 중에는 복공판 위로 버스 등 차량이 다녔다. 간혹 복공판이 가라앉는 사고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며 도로와 다리 놓는 기술이 축적되었다. 요즈음의 터널 공사는 설계도에 따라 거의 자동으로 주야간 없이 기계가 암벽과 토사를 깎아 낸다고 한다. 여기에 동원된 기계의 제작과 운용 과정은 모든 첨단 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로와 터널 공사의 경험이 건설 기술로 축적되어 그 뒤 전국에 많은 도로가 개통되었다. 초기에는 평지 위주로 도로가 건설되었는데 요즈음은 산속을 관통하여 터널과 다리를 놓는 공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토지 보상 금액이 훨씬 적게 들기 때문이다. 수도권에는 더욱 깊은 지하에 터널을 뚫고 전철을 다니게 하는 GTX 계획이 세워지고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깊은 지하에는 토지 보상 의무가 없는 점이 장점이고 중요한 거점 지역에만 정차하여 수도권에서 서울 도심 진입이 빨라진다는 이점이 있다.
고속도로의 건설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예를 영동고속도로로 들어 보고자 한다. 서울에서 정동 방향인 강원도 강릉에 오죽헌(烏竹軒)이 있다. 신사임당(1504~1551)의 친정으로 율곡 이이를 낳은 곳으로 알려진다. 그 옛날에 신사임당이나 그 일가들이 서울에서 강릉을 가려면 미리 계획을 잡았을 텐데, 가는 데만 한 보름은 잡았을 것이다. 지체 높은 주인이나 식구들은 말이나 가마를 타서 큰 힘이 들지 않았겠으나 수종 드는 사람은 걷는 데만 해도 큰 힘이 들었을 것이다. 특히 가마를 메고 대관령을 넘어가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땀을 꽤 흘렸을 것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나라가 발전하면서 강릉 가는 길이 뚫렸다. 도로는 점점 넓혀지고 직선화되었다. 한때 대관령 넘어가는 자동차 도로인 국도가 생겼어도 꾸불꾸불 돌아서 가느라고 고개를 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간혹 버스가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뉴스에 전해지기도 했다. 영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대관령을 넘어가는 시간은 많이 단축되었지만, 여름휴가철이나 명절 때는 정체로 인하여 서울에서 출발하면 하루가 다 달아났다. 영동고속도로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직선화되었다. 대관령 지역도 많은 터널과 다리가 놓이면서 지금은 수십 분이면 고개를 넘어 강릉에 도착할 수 있다. 그 뒤 고속도로가 더 생겨서 영동고속도로 접근 방법이 다양해져서 이제는 서울에서 강릉까지 안 막히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정말로 장족(長足)의 발전이다. 500여 년 전에는 가는 데만 보름 정도 걸리던 거리가 이제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가서 일 보고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전국에 도로가 늘어날수록 멀쩡하던 산과 들을 갈라놓는 일이 많아졌다. 마을이 갈라지고 해서 주민의 생활환경이 바뀌고, 양계장이나 목장 등의 동물 사육장이 도로 옆에 위치하게 되면 동물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옛날에 철도가 새로 개통되어 겪었던 변화는 별 게 아닌 게 되었다. 도로가 생기면서 야생동물의 이동 경로에 교란이 생겨서 도로에 동물이 뛰어들어 치어 죽는 로드 킬(road kill) 사고가 가끔 있다. 이 사고로 자동차의 손상은 물론 사람의 안전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지역에는 야생동물의 출현에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고 동물의 이동을 위한 오버패스(over pass)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다. 이를 생태 통로 혹은 에코 브리지(eco bridge)라고 써 놓은 팻말을 고속도로를 가면서 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