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류와 교류 논쟁
요즈음 발전소에서 가정이나 공장으로 공급되고, 대부분의 전기 제품이 사용하는 전기는 교류이다. 반면에 전기자동차를 비롯하여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 제품은 모두 직류 전기로 구동된다. 전기가 발명되고 우리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지금으로부터 대략 1세기 전에는 전기는 교류로 써야 하는지, 직류를 사용해야 좋은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에디슨과 테슬라이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은 자신을 발명가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지금 그를 과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당시 발명에 대한 견해차가 유럽과 미국의 과학계 및 발명계에 있었다. 유럽 과학자들은 발명을 단순 기교로 보았고 자기들이 하는 일은 고상한 순수과학으로 간주하였다. 전기에 관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자신의 발견을 돈을 벌기 위하여 상업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에디슨과 동시대 미국의 발명가들은 추상적인 이론에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항상 생각했다. 에디슨은 무학으로 알려져 있고 수학 실력은 빵점이었다. 그 자신도 ‘99%의 땀과 1%의 영감’이란 말로 자신의 업적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과학 지식과 발명의 내용이 복잡해짐에 따라 그도 자신의 실험실에 젊은 과학자와 수학자를 조수(assistant)라는 이름으로 채용하였다.
에디슨은 다작으로 유명하다. ‘열흘에 작은 발명 하나, 반년마다 큰 발명 하나’라는 목표로 자신의 연구실을 운영하였다. 일생에 걸쳐서 천여 개의 특허를 취득하여 현재까지 개인 최고 기록 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발명으로 상업용 백열전구와 직류 전기 공급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자신의 독창력이 발명의 과정에 크게 들어간 것은 아니다. 다만 탁월한 마케팅 능력과 시스템 어프로치 개념으로 사업에서 성공하였다. 사전 분석 끝에 자신의 발명 분야 중 하나인 전화와 전신 시장에 진입하는 것보다 전기조명 시장에 돌입하는 것이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많은 사람이 더 좋은 발광재료 찾기 등 백열전구의 개량발명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는 전기를 분배 공급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면 전구를 많이 팔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시스템은 당시 유행하던 가스 아크 램프에 가스를 중앙공급하는 시스템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아울러 발전기, 전력계량기, 스위치, 휴즈(fuse), 전선. 절연체 등 연관되는 하부시스템 즉 전기부품 개개의 발전이 있어야 전체 시스템의 성능이 향상되고 돈벌이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사업계획을 보고 모건(John P. Morgan, 1837~1913) 등 자본가들이 에디슨에게 모여들어 Edison Electric Light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모건이야말로 발명 혹은 연구 프로그램에 자본을 지원한 첫 번째 벤처투자사업가로 사업과 발명의 관계에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 그 결과 1879년 백열전구의 발명을 완결하고 3년 뒤에 뉴욕에서 최초의 중앙공급식 발전소를 개소하고 1884년 500여 가구에 전선을 연결하여 증기기관을 사용한 직류발전기로부터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는 전통적인 유럽의 과학으로 훈련된 사람이다. 크로아티아 지방 출신인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Graz Polytechnic 대학에서 물리와 전기를 배웠다. 거기서 Gramme의 발전기(dynamo)를 접하였는데, 이 기계는 교류전기를 일차로 발생시킨 후, 정류자(commutator)를 써서 직류 전기로 바뀌게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전기는 직류만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고전압에는 정류자가 타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테슬라는 정류자 없이 바로 교류전기를 뽑아 모터에 쓰는 방법을 궁리하였다. 이 아이디어를 1880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구체화시켰다. 회전하는 자장 하에서 다상(polyphase)의 교류전기를 발생시켜 바로 모터에 이용하는 시스템을 구상하였는데, 이 아이디어를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는 사람이 당시 유럽에는 없었다. 미국에 있는 에디슨의 명성을 듣고 있던 그는 에디슨 회사의 파리 지사장으로부터 추천장을 얻어 188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에디슨 연구실의 조수가 되었다.
같이 일을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차이점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에디슨은 전기는 직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데 테슬라는 교류만 생각하고 있었다. 테슬라는 유럽의 명문대학에서 교육받은 사람으로 수학과 시에 소양이 있었지만, 에디슨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테슬라는 자신의 보헤미안적인 기질이 말해 주듯이 8개 국어를 할 줄 아는데, 에디슨은 영어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테슬라는 정장 차림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식으로 식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에디슨은 며칠씩 내복을 갈아입지 않고 입은 채로 자며, 음식은 파이와 커피 정도만 먹었다. 에디슨은 발명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자신이나 밑 사람한테 돈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짠돌이였다.
발명의 스타일에도 두 사람은 큰 차이가 있었다. 에디슨은 능력 있는 조수들을 많이 고용하고, 시행착오 법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며, 나중의 특허출원을 의식하여 꼼꼼하게 기록해 두며, 돈 버는 연구를 주로 하려고 하였다. 테슬라의 눈에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혼자서 머릿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도면을 그려가면서 수학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그가 익힌 연구 방법론이었다. 결국 일 년 만에 무일푼으로 에디슨의 곁을 떠난 테슬라는 고생 끝에 몇 사람의 후원자를 만나 뉴욕시에 실험실을 세웠다. 거기서 부다페스트에서부터 구상해 왔던 교류를 채용한 발전기, 모터, 변압기 등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였다.
에디슨의 돈줄이 모건이었다면, 테슬라에게 나타난 구원의 천사는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 1846~1914)였다. 웨스팅하우스는 원래 에어 브레이크 등 기계장치 발명자로서 전기철도의 자동스위치 장치를 가지고 전기업계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테슬라를 후원함으로써 교류전기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였다. 테슬라가 구축한 교류 시스템은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보다 경제성과 다양성이 있었고 채용하는 모터 자체가 가볍고 제작이 간단하였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이 자기와 자신의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웨스팅하우스의 자본과 연합한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 때문에 자기 사업이 망하겠다 싶었다. 궁리 끝에 내놓은 대책이 교류는 인체에 해롭다는 내용의 비방 선전이었다. 교류는 냉정하고 살인적이나 직류는 온화하고 친밀하며 안전하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기자회견을 열어 큰 개(dog)를 수천 볼트의 교류 전원에 연결하여 감전시켜 죽이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모건과 테슬라는 투자에 관한 한 인연이 없었나 보다. 모건은 테슬라의 일생 목표 중 하나였던 무선 송전탑 사업에 투자했는데 도중에 모건이 실현성이 없다는 판단에 투자를 끊어 공사가 중단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에디슨은 한 수 더 떠 자신의 조수를 시켜 사형집행용 전기의자를 고안하여 뉴욕주 교도소에서 채택하도록 교섭하였다. 에디슨은 교도소 측에 교수형보다는 전기충격형이 기술 시대에 맞는다고 설득하고 웨스팅하우스 회사의 교류 발전기를 채용하여 웨스팅하우스의 이미지에 먹칠하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웨스팅하우스 측에서 분노하고 직류도 교류만큼 살인적일 수 있다고 반박하였으나, 고전압은 어차피 교류의 영역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송아지, 말, 코끼리 등 동물들을 대상으로 사전 실험을 거친 다음 1890년에 전기의자에 의한 첫 사형집행이 있었다. 에디슨의 발명품 리스트에 교류를 사용한 전기의자가 추가되었고, 전기의자는 그 후 미국에서 한동안 대표적인 사형집행기구가 되었다.
그 뒤 3년 뒤인 1893년 웨스팅하우스는 시카고 만국박람회장에 교류전기를 공급하였다. 교류의 장점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산업계에서는 교류 전원을 찾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에디슨의 회사도 교류전기 시장에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되어 양사의 전류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후에 에디슨은 자기 아들에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교류로 전환하지 않은 것이야’라고 고백했다고 전해진다.
에디슨은 자신의 시장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경쟁자와 연합하는 사업전략을 구사하였다. 전기 관련 사업으로 웨스팅하우스 회사와 경쟁하던 중에, 당시 아크 램프 시장을 갖고 백열전등의 에디슨과 경쟁하던 회사와 합병하고 1892년 General Electric(GE) 회사를 탄생시켰다. 기업합병(M & A)의 효시인 셈이다. 이로써 미국 전기업계의 양대 산맥인 GE와 Westinghouse의 경쟁 관계가 본격화되었다. 양사의 경쟁의식은 특허 분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1896년까지 4년여 동안 300개 이상의 특허 소송이 양사 간에 있었다고 한다. 같은 업종 내에서 유사한 특허를 서로 갖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특허를 사용하니까 분쟁이 불가피하였다.
특허 송사가 상호 간에 이로울 게 없다는 판단 아래 협상에 들어간 양사는 합병이라는 방법 대신에 상호특허조절위원회를 만들어 양사의 특허를 상호 검토하고 정리하여 법적 소송 없이 상대방의 특허를 서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작금에 업계에서 말하는 second sourcing의 관행이 이때 확립된 것이다. GE와 Westinghouse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에디슨이 뉴욕에 설치했던 실험실의 개념이 회사의 연구소로 확장되었다. 벨연구소(Bell Lab) 등이 이때 태동하였다. 회사는 발명가, 과학자, 엔지니어를 채용하여 조직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다. 발명가는 이제 월급쟁이로 전락하고, 특허의 소유권이 개인에서 회사로 바뀌게 되고, 직무발명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특허 분쟁에 신물이 난 에디슨은 말년에 자신이 40여 년 동안의 발명으로 얻은 이득은 하나도 없고 송사뿐이라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자기의 특허를 방어하기 위하여 많은 소송비용을 지출하였다. 어쨌든 에디슨은 부자로 죽었다. 한편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 회사에서 1년여 일하다가 새로운 전기 이론을 확립하겠다고 그만두었다. 그는 1899년 콜로라도(Colorado)에서 인공 번개를 실연해 보이는 등 고전압하에서 전기와 자기의 상호작용에 대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테슬라는 현대 전기 문명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이다. 한 발 앞선 발명으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 방향을 후세에 알려 주었다. 수많은 전기 실험으로 ‘현대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그가 완성은 못 했어도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 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전기에 관한 발명에 힘을 쏟은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동안 니콜라 테슬라는 그의 특이한 성격과 행동으로 괴짜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그는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과학자였지만, 사후에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후세의 과학자들은 1961년 순수 및 응용물리학 국제연맹(IUPAP)에서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기존의 가우스(gauss) 대신 그의 이름을 딴 T(Tesla)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든 테슬라에게 걸맞은 단위이다. 1T(tesla)는 기존의 단위인 gauss의 (10의 4승)배이다. 1 gauss는 지구 자기장의 약 두 배에 해당한다. 아직도 gauss가 자기장의 단위로 쓰이기도 하지만 SI 단위에서는 T(tesla)를 선호한다. 약간의 물리와 수학적 관계식을 이용하면 1T는 전하의 이동도(mobility) 단위의 역수로 Vs/m2이라고 쓸 수 있다.
현재 전기자동차를 생산 공급하는 미국의 유명한 회사 이름에도 '테슬라'가 사용되고 있다. 전기 분야에서 테슬라의 업적을 인정한 회사 창업자가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테슬라가 평생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고전압의 교류가 아닌 저전압의 직류 전기로 자동차는 구동되고 있다.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