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70년 많은 희생자를 남기면서 끝난 로마와의 전쟁 결과로 수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끌려갔다. 로마는 예루살렘 근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유대인 거주자의 숫자는 극도로 줄어들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 내에서 중대한 변화가 왔다. 제사장 중심의 귀족정치는 그 주도권을 율법주의자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유대인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랍비들의 율법 학교가 있는 해안지방의 야브네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영적인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띤 유대인을 중심으로 제2차 유대인 반란 운동을 일으켰으나 로마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로마군은 모든 유대인을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서 추방하였다. 그 결과 유대인의 중심지가 갈릴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틴 황제 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기독교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의 모친 헬레나는 이스라엘의 성지를 직접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적지들을 성역화하였다. 여러 분야의 발전이 이스라엘의 전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 성장하여 옛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비잔틴으로 옮기고, 330년 이 도시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그가 죽고 난 후 로마제국은 다시 양분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7세기 아랍의 침공이 있기까지 약 300년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남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에 예속되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경제적으로 번창하였고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타국으로 이주함으로 그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기독교는 점차 이 지역 거주자들의 중심적인 종교가 되었다. 무역, 학문, 예술 등이 이 시기에 번성하였다. 인구밀도의 증가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거나 기존 도시를 정비하게 되었다. 당시 도시 계획은 주로 물을 저장하는 데 최대의 목표를 두었다. 거주민들은 자기 집 근처에 큰 바위를 이용하여 저수조를 마련했다. 이 저수조는 방수시설이 되어 있었고, 지붕에서부터 빗물을 끌어들이는 수도관도 마련되어 있었다. 큰 도시에는 간선도로에 노상 도수관을 마련하여 도시 중앙에 거대한 저수조로 모이게 하였다. 수도관은 주민들이 번갈아 가며 청소하여 청결이 유지되었다. 저장된 물은 가정용뿐만 아니라 공중목욕탕과 농사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물 사용의 대가로 도로 이용자에게 통행세를 부과하여 이 도시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630년 비잔틴 군대는 야르묵강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갈릴리 지방을 모슬렘에게 넘겨주었고 그로부터 8년 뒤에 모슬렘 세력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모슬렘 성지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아랍 세력은 초기에 경제적 측면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슬렘이 아닌 토지 소유자들에게 더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에 따라서 사람들이 점차로 농사를 포기하고 직조, 염색, 금은세공 등에 종사하게 되었다. 일부는 상업과 무역으로 생업을 바꾸었다.
소아시아에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던 셀죽 튀르키예(Seljuk Turks)가 이스라엘 지역을 공격하였고 1077년 예루살렘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지순례객들이 자유롭게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하였으나 셀죽 튀르키예는 이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을 제안하였다. 십자군 원정대는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내의 모슬렘 거주자들과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십자군 왕국은 초기 100여 년 동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1185년 왕위 문제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또한 십자군들은 메카로 가는 모슬렘 순례자들을 공격함으로써 모슬렘 세력과 부딪쳤다. 1187년 예루살렘을 비롯한 해안지방의 십자군 도시들이 모슬렘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십자군들은 성지 재탈환을 위하여 여러 차례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였지만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십자군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스라엘 지역은 다른 튀르키예 출신인 마므륙(Mamluk)과 몽골이 맞서서 싸우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마므륙은 1260년 벧산 근처에서 몽골족을 격퇴하고 나서,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군을 영구히 추방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들이 이스라엘을 떠난 후 더 이상 팔레스타인에 상륙할 수 없도록 하려고 지중해 해안을 따라 세워진 십자군 성채들을 모조리 모래 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 이후 약 250년간 지속된 이스라엘의 마므륙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1516년 오스만 튀르키예에게 패배하였다. 오스만제국은 전성기 때는 통치권이 북쪽의 비엔나에서 남쪽의 아라비아반도 남단까지 미쳤다. 전성기 이후 오스만제국의 통치력이 약화되더니, 프랑스 나폴레옹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침공(1798~1801년) 이후 오스만제국의 운명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러시아에 의해 많이 좌우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확장하였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비교적 반유대주의 경향이 없었던 팔레스타인을 찾아들었다. 본격적인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민은 19세기말 시온주의 운동의 고조로 급증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오스만제국의 통치가 종식되었던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유대인들의 이민은 크게 두 차례 있었다. 제1차 이민은 주로 러시아와 루마니아 출신으로 이루어진 개척자들로 이들의 이민은 1897년에 시작하여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제2차 이민은 1904~1914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2차 이민은 주로 사회주의적 이상을 주장하는 러시아 출신들로 이루어졌다. 2차 이민자들은 최초로 키부츠와 모샤브를 이스라엘에 건설한 장본인들이다. 이러한 이민자들의 유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9년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유대인 도시 텔아비브가 욥바 근처에 세워졌다.
세계 1차 대전 기간(1914~1918년) 동안 오스만 튀르키예는 독일 편에 있었다. 세계 1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는 이스라엘에서 약 400년 동안 지속되었던 튀르키예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이때부터 아랍-이스라엘의 갈등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결성된 국제연맹은 중동지역에 위임통치(mandate)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1920년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영국은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각각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해외의 유대인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유입하는 일을 촉진시켰다. 특히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 이민이 급증하면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지만, 현지 아랍인들과 유대인 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두 민족의 갈등과 긴장은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차 대전 중에 튀르키예군과 싸웠던 아랍의 지도자들은 국제연맹의 이런 결정을 약속 위반이라고 받아들였다. 후세인 가문 출신 압둘라(Abd Allah ibn al-Husayn, 1882~1951)는 군대를 조직하여 메카로부터 요르단 지역으로 침입하였다, 영국은 압둘라와 협상 끝에 팔레스타인을 요단강 중심으로 양분하기로 하였다. 요단강 서안 지역(West Bank)은 영국의 직접적인 위임통치 지역으로 정하였고, 요단강 동편 지역은 압둘라를 왕으로 하는 아랍왕국(오늘날 요르단)으로 삼아 영국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이런 상황은 1948년 영국이 이 지역에서 위임통치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급속하게 발전하였으며, 현대적인 경영 구조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급증하는 유대인 이민은 이곳의 원주민 아랍인들과 인종적 갈등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영국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위임하였고, 유엔은 1947년 팔레스타인에 아랍과 유대인을 분할하여 두 나라를 세우는 안건을 상정하였다. 분할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세우겠다는 유엔의 결정은 아랍 측의 거부로 무효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8년 영국은 철수하고 유대인과 인근 아랍국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해에 휴전이 되고 요단강 서안 지역과 예루살렘 동부의 구시가지는 아랍인 지역이 되었다. 그 후 1950년 주민들의 결정으로 이 지역은 요르단의 압둘라 왕국에 예속되었다. 유대인들이 세운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은 예루살렘의 서부지역과 요르단 서안 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을 차지하였다. 시나이반도 대부분과 가자지구(Gaza Stripe)는 이집트의 통치 지역이 되었으며, 갈릴리 호수의 동북부인 골란고원은 시리아의 통치 지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주변의 아랍 국가들과 다섯 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은 1967년 6월에 있었던 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으로 이집트가 통치하였던 시나이반도, 시리아가 통치하였던 골란고원, 요르단이 통치하였던 동부 예루살렘과 요단강 서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은 여러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가 국제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유엔은 총회 결의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하여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 지위 등을 인정하면서 PLO에 유엔 옵서버 자격을 부여하였다. 또 하나의 중대 변화로 1977년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시나이반도를 되찾았다. 두 나라는 양국 간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원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어렵게 조성된 중동지역의 평화 분위기를 외면하고 이전 전쟁에서 점령하였던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골란고원을 1980~1981년에 자신의 영토로 공식 합병시켰다. 이 협정부터 중동지역의 중재자를 미국이 떠맡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대표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나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와 이스라엘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임시자치정부 출범의 계기가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와 선거, 과도기 협정,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 유대인 정착촌, 난민 문제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와 이스라엘이 평화적인 공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 협정으로 1994년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를 수반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이 선언되었다. 1995년 2차 협정으로 완성된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를 설립하는 대신 아랍권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 기본원칙이다. 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의 철군을 진행했고 팔레스타인은 1996년 잠정 자치정부를 본격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양측 간에 체결되는 협정들은 오슬로 협정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계속 인정하는 등 여러 내용이 팔레스타인 측에 불리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즉, PLO가 팔레스타인 임시행정당국(Palestine Authority: PA)으로 이름을 바꿔 제한적인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오슬로 협정을 성립시킨 아라파트 수반과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이스라엘 총리는 페레스(Shimon Peres, 1923~2016) 당시 외무장관과 함께 199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 극우파의 반발을 산 라빈 총리는 1995년 암살되고, 뒤이어 집권한 우파 연합의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1949~ ) 총리는 팔레스타인 당국으로의 점령지 반환을 거부하면서 협정 이행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뒤이어 1996년 하마스의 자살폭탄테러 등이 발생하는 등 오슬로 협정 이행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다 2003년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 '중동평화로드맵'에 서명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 점령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여리고에서 2005년 9월 완전히 철군하였다.
이스라엘에서 강경파가 득세하는 사이 팔레스타인 측에서도 강경파가 힘을 축적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요단강 서안에 있는데, 팔레스타인 측의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Hamas)가 2023년 10월 7일 유대교 안식일에 이스라엘 남부를 겨냥해 로켓포 공격을 감행한 데 이어 하마스 무장대원들이 패러글라이더 등을 활용해 분리 장벽을 넘어 이스라엘 영내로 침투했다. 이들은 가자지구와 맞붙은 이스라엘 남부지역에서 민간인들을 공격했으며, 수십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우리는 전쟁 중'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뒤 반격에 나서면서 양측 간 전쟁이 공식화됐다. 여기에 레바논의 무장단체 헤즈볼라까지 이스라엘 공격에 개입하면서 해당 분쟁이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최대 격돌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적으로 포위하고 물 공급을 차단했으며, 팔레스타인 목표물에 지속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하마스에 대응하는 작전을 '철검(Iron Swords)'으로 명명하고 전투기 등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복 공습에 나섰다. 이처럼 양측의 무력 충돌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지속돼 온 것인데, 특히 2022년 말 네타냐후 총리의 재집권 이후 극우 정책이 지속되면서 양측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미국과 서방 국가의 정상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을 테러 행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란, 레바논 등 이슬람 시아파 국가들이 하마스의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팔레스타인 편에 서겠다고 선언하면서 중동 정세는 큰 혼란에 빠져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마스의 대규모 기습이 일어난 과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력을 자랑해 온 이스라엘의 첩보 조직 '모사드(Mossad)'는 해당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Iron Dome)'은 곳곳이 뚫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철수한 2005년 이후 팔레스타인 극단 세력의 공격을 막기 위해 로켓 방어시스템인 '아이언돔'을 도입했고, 지하 방어벽과 감시 센서를 갖춘 '스마트 국경 시스템'도 구축했으나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서 이러한 체제들이 모두 무력화됐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충돌로 가자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을 구성하는 요단강 서안지구에서 제3차 인티파다가 촉발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하마스는 이번 작전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당해온 잔혹 행위에 대한 대응이라며 요단강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인과 주변 아랍 세력에 동참을 요청하였다. 인티파다는 1987년 처음 시작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운동으로, 지금까지 2차례의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 차량이 팔레스타인인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를 계기로 촉발돼 약 1,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이뤄질 때까지 진행됐으며,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중동 평화 회담이 진행됐다. 그러나 2000년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평화 회담이 결렬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2차 인티파다는 2000년 당시 이스라엘 야당(리쿠드당)의 지도자이던 샤론(Ariel Sharon, 1928~2014)이 모슬렘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사원을 도발적으로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항의하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는 이스라엘의 강경 진압으로 유혈 충돌로 확산되고, 오슬로 협정 파기로까지 이어졌다.
2023년 하마스의 공격은 극우 세력과 연합해 재집권한 네타냐후 총리의 극우 정책 지속에 따른 갈등 고조는 물론, 미국의 주도로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 간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제동을 걸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유대인 정착촌 확대, 서안지구 내 동예루살렘 지배권 강화 시도,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 천명 등 극우 정책을 지속해 왔다. 유대인 정착촌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등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있는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중단을 요구해 왔으나 네타냐후 정부는 정착촌 건설 확대를 강행했다. 여기다 이슬람·유대교·기독교 등 세 종교의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성전산'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도 충돌 가능성을 높여 왔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근거지로 알려진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난민촌에 지상군 병력과 드론까지 투입, 2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스라엘은 2020년 미국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모로코 등 아랍권 국가와 관계를 정상화하는 '아브라함 협약'에 서명했고, 최근에는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 만약 사우디아라비아마저 이스라엘과 관계를 회복하면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강경 투쟁노선을 고수해 온 하마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마스가 이에 제동을 걸기 위해 공격에 나섰다. 이는 이스라엘과 수니파 아랍권의 밀착이 자국 안보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한 이란의 입장과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이번 하마스의 공격 배후에 이란이 있다는 의혹이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이 가열되면서 2024년에 이란의 미사일이 여러 발 이스라엘 측에 발사되었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방공체계가 이란의 미사일을 자국 영토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하여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는 지난번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에 대하여 방공체계가 무력했다는 지적에 대한 반론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항공기에서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이란 내 목표물을 명중하였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은 여론전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가자지구의 아랍병원에서 폭발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숨지는 사건에 대해서 서로의 소행이라고 비난하는 가운데,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상 작전 확대를 결정했다고 선포하면서, 가자지구에 대한 본격적인 지상전을 개시했다. 이후 가자지구에는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의 공습이 가해졌으며,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최대 도시인 가자시티의 완전 포위를 선언하고 시가전을 전개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가자지구 내 최대 병원에 군사작전 거점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병원을 급습했다. 이스라엘은 병원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라는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병원 급습을 강행한 뒤 하마스가 병원을 군사용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라며 병원에서 찾은 무기 등을 연일 공개했다. 하마스와 PA는 그 병원에 무기는 없었다면서 이스라엘이 제시한 증거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2023년 11월 24일부터 합의대로 휴전에 들어갔는데, 이는 하마스가 지난 이스라엘을 기습하며 전쟁이 발발한 지 48일 만에 일시적으로나마 이뤄진 첫 휴전이다. 국제사회는 이 임시 휴전을 계기로 휴전 체제로의 전환을 촉구했으나 하마스를 궤멸하겠다는 이스라엘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어 전쟁 양상에는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군이 12월 1일 가자지구 공습을 재개하면서 양측의 휴전은 다시 요원해지게 됐다. 특히 이스라엘군은 12월 3일 가자지구 남부로 작전 실행을 공식화하면서 공중전과 남부와 북부에서 동시에 지상전을 벌이는 단계에 돌입했다. 이스라엘은 남부 지상전 개시에 대해 앞서 임시 휴전 기간 가자지구 북부에 머물던 하마스 지도부가 남부로 이동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하마스의 최후 보루로 여겨지는 가자지구 최남단에 대한 무력 압박을 가해 온 이스라엘군이 북부에서도 다시 하마스와 치열한 교전에 돌입하면서 사상자 수 증가 폭이 커지고 있다. 2024년 5월 12일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전날 가자지구 북부에 있는 난민촌에 다시 탱크를 진입시켰다.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사이 전열을 정비하려는 하마스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하마스는 가자지구 남부와 북부 등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로켓을 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가자지구 남단과 북부 분리 장벽과 가까운 이스라엘 남부 등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방공망 아이언돔이 가동되었다. 하마스 측은 가자지구 내 사망자가 개전 218일간 35,000여 명이 됐다고 밝혔다.
항공기에서 지상 표적을 타격하는 공중발사 탄도미사일(Air Launched Ballistic Missile; ALBM)이 전쟁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를 조짐이 있다.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은 항공기에서 탄도미사일을 투하하면, 미사일이 지상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적군 방공망 밖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항공기는 안전하게 지상 타격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수 있다. 냉전 시절 핵 폭격기 탑재용으로 개발되었는데, 냉전 이후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양새이다. 러시아와 중국, 이스라엘, 미국 등이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거나 실전에 사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실전에 투입했고,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에서도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직면한 한국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의 개념과 기술은 1950년대부터 등장했다. 당시 미국은 폭격기가 적진에 침투해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수단의 하나로 고려하였다. 옛 소련 방공망이 강화되면서 폭격기의 생존이 위태롭게 생각되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 SLBM)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기술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이번에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이 등장하였다. 그렇게 자취를 감췄던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이 냉전 이후 러시아와 중국, 이스라엘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들 국가는 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무기를 다시 꺼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방공망과 공중전 능력의 강화다. 세계 각국의 방공망은 정밀도와 사거리가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다. 패트리엇 외에도 사드(THAAD), 아이언돔, 애로, S-400을 비롯한 고성능 방공체계가 세계 곳곳으로 확산했다. 전투기 탑재 공대공미사일 사거리가 늘어났다. 기존 방식으론 미사일과 항공기는 임무 수행과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중발사 탄도미사일은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음속 이상의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탄도미사일을 쏘면, 지상 발사 미사일보다 속도와 사거리가 훨씬 늘어난다. 위력도 순항미사일보다 강하다. 적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서 미사일을 발사해 방공망을 파괴하고, 순항미사일 등을 사용하면 표적을 타격할 가능성이 높다. 항공기는 지상의 미사일 발사 차량이나 해상의 군함과 달리 하늘에서 자유롭고 빠르게 움직인다. 적 방공망이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적군은 발사 원점 추적이 쉽지 않고, 아군은 전략적 유연성을 한층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공중발사 플랫폼으로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쓰인다. 전투기는 높은 발사 속도와 고도를 확보할 수 있고 고각 확보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반면 중량 제약과 전투기 개조 문제로 전투기 제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는 탄도미사일 탑재가 제한될 우려가 있다. 폭격기는 더 무거운 중량의 미사일 탑재가 가능하지만, 속도가 전투기보다 느리다.
이스라엘의 보수 우파 연합을 이끄는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인 1949년 10월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대학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고, MIT에서 학사과정으로 건축학을 공부하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2년 주미 부대사, 1984∼88년에는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지냈다. 네타냐후는 1988년 초선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1993년 보수 리쿠드당 당수로 선출됐다. 이후 1996년 총선 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페레스 노동당 대표를 누르고 46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1999년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정계를 떠났다가, 2003년 샤론 총리의 연립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2년 뒤인 2005년, 샤론 총리가 가자지구의 정착촌 철수를 감행한 데 반발하면서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2005년 다시 리쿠드당 대표에 선출됐으나, 리쿠드당은 이듬해인 2006년 총선에서 12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참패했다. 리쿠드당은 이후 2009년 조기 총선에서 2위에 머물렀지만, 연정에 성공하면서, 네타냐후는 2번째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리쿠드당이 2013, 2015, 2019년 총선에서 연달아 승리하면서 총리직을 이어갔는데, 2019년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하면서 네타냐후는 13년 5개월 재임한 벤구리온 초대 총리를 제치고 가장 오랫동안 총리직을 수행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2021년 6월 13일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가 9개 야권 정당이 동참하는 연립정부를 최종 승인하고 새 연정이 공식 출범함에 따라, 2009년 이후 12년간 이어진 네타냐후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다 네타냐후가 이끄는 우파 진영이 2022년 치러진 총선에서 120석의 크네세트 의석 중 절반이 넘는 64석을 확보함에 따라 네타냐후는 우파 정당만으로 연정을 꾸리고 1년 반 만에 총리직에 복귀하게 됐으며, 이로써 15년 동안 이스라엘 역대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의 네타냐후는 집권 기간을 더욱 늘리게 됐다. 네타냐후는 유대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성향이 뚜렷한 인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왔고, 이에 이란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은 물론 국제사회와도 마찰을 빚어왔다. 특히 2019년 총선을 3일 앞두고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 영토로 인정하는 요단강 서안지구 정착촌을 이스라엘로 병합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MIT 출신으로 미국의 국무장관을 오랫동안 역임한 슐츠(George P. Shultz, 1920~2021)가 한편으로 생각난다. 그는 뉴욕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4년간 해병대 근무를 마치고, 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57년부터 1968년까지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고 1969년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 행정부에 노동장관으로 입각한 뒤에 예산국장과 재무장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1974년에는 벡텔사(社) 부사장으로 재계에 투신, 사장과 회장을 역임한 후 1982년 국무장관으로 발탁되어 미국 외교의 사령탑이 되었다.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돼 1989년 레이건 퇴임 때까지 함께하며 전후 최장수 국무장관으로 재직했다.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감축 조약을 주도해 냉전 종식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1987년 구소련과 '중거리핵전력조약' 협상을 주도해 냉전 종식의 기반을 열었다. 사거리 500〜5,500km인 미사일의 생산 및 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이 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과 러시아는 1991년까지 해당 미사일 2,692기를 폐기하는 등 군비 경쟁을 끝냈다. 그는 퇴임 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특별연구원 등을 지내며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100세를 누리며 장수하였다. 슐츠는 국무장관 시절 한국을 6차례 방문했으며, 1992년에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 서울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