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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12. 2024

E16. 사해

 사해(死海, Dead Sea)는 유대 광야의 낭떠러지 부근에 있는 호수이다. 사해는 남북 방향으로 67km, 동서 방향으로 18km인 완전히 폐쇄된 바다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의 국경과 접하고 있다. 해수면은 해저 약 430m이며 지구상에서 지표로부터 가장 낮은 곳이다. 사해 중에서 가장 깊은 곳은 약 400m나 된다. 히브리어로 사해는 소금 바다를 뜻하며, 성서에는 ‘아라바 바다’, ‘동해’ 등으로 적혀 있다. 사해의 남쪽 서편에 로마 시대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마사다가 있다. 매일 많은 물이 요르단강으로부터 사해로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없지만, 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위를 유지한다. 이는 연중 기온 변화가 별로 없이 고온이 계속되는 곳이다 보니 들어오는 양만큼의 물이 계속 증발하기 때문이다.

     

 사해는 유대 사막인 고원지대와 높이차가 800m에 이른다. 사해는 지구의 여러 판 중에서 아라비아판과 아프리카판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 두 개의 판은 이 지점에서 서로 벌어지면서 북쪽으로 밀려 올라갔는데 아라비아판이 아프리카판보다 더 빠르게 위로 밀려 올라갔다. 그 결과 아카바만에서 터키 사이에 큰 단층이 형성됐다. 이를 사해 단층(Dead Sea Fault)이라 하며 지금부터 1,7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단층에 기인한다. 사해는 이 두 개의 판이 밀려 올라가는 과정에서 주변 지형보다 균열이 더 깊게 파이게 되면서 형성되었다. 오늘날 아라비아판과 아프리카판은 상대적으로 1년에 4~8mm 정도 움직인다고 관측된다.

     

 사해의 물은 기본적으로 지중해에서 유입된 바닷물이다. 400만 년 전 지구 온난화로 기후 대변동을 겪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이 상승했는데 이 과정에서 바닷물이 지중해에서 흘러들며 호수가 형성됐다.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 빙하기가 도래하면서 물이 더 이상 흘러들지 않게 됐고 이로써 현재의 사해보다 긴 225km 길이의 거대한 호수가 형성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지역의 무더운 기후와 함께 호수의 물은 증발하기 시작했다. 호수 면이 차츰 낮아지면서 지중해 해수면보다 낮아지기에 이르렀고 증발이 계속되면서 거대한 호수는 북쪽의 갈릴리 호수와 남쪽의 사해로 나뉘게 됐다. 이 두 호수는 요단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표면의 모든 암석은 소금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빗물은 하천을 통하여 암석에 포함된 무기염을 바다로 흘려보낸다. 흘러 들어간 소금은 바다 밑으로 퇴적되기 때문에 바다의 염도가 계속해서 높아지진 않는다. 사해의 염도는 34.2%다. 일반 바닷물의 10배 정도나 된다. 사해의 소금 함유량이 높은 이유로 사해가 닫힌 바다에 속한다는 사실과 이 지역의 더운 기후를 꼽는다. 고대부터 사해의 광물 성분은 다양한 질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해에는 소금이 물속에만 있지 않다. 사해에는 응고된 소금 덩어리가 있는데 소금층은 두껍고 단단하며 날카로워서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한다. 소금은 각종 기이한 장관을 연출한다. 구약성경 창세기 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소금기둥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오늘날 사해 주변에는 소금과 침전물로 이뤄진 거대한 절벽과 동굴이 있다. 소금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으로부터 300만 년 전에 있었던 소금이 있는데 굉장히 투명해서 맨눈으로도 건너편이 잘 보인다고 한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굴뚝이 있는데 천정이 빗물로 인해 뚫려 생긴 것이다. 빗물이 지면으로 침투하며 그 자리에 있던 소금을 녹였고, 녹은 소금은 여러 통로를 통해 사해까지 운반되었다.

      

 사해의 수온은 약 28도 정도로 따뜻하다. 부력이 높아 저절로 몸이 뜨기 때문에 수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안심이다. 조그만 배 위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관광객의 사진이 있을 정도이다. 사해는 소금 함유량이 높은 만큼 독성도 강하다. 해수욕장에 대한 관리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다. 호숫물을 많이 삼키게 되면 위험하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는 담수로 몸을 반드시 씻어야 한다. 사해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칼슘과 마그네슘 함유량이 많아서 생물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도 사해의 물에는 박테리아와 몇몇 다세포 생물이 현미경으로 관찰된다.

      

 사해 소금의 효용가치는 높다.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진흙(머드) 목욕을 하러 사해를 찾는데 사해의 진흙은 화장품 원료로 쓰여 외국으로 수출된다. 사해 소금은 비료, 불을 끌 때 쓰는 소화제나, 제약산업에 사용된다. 추출된 마그네슘은 금속 그 자체나 합금 재료로 사용된다. 마그네슘 합금으로 만들어진 금속은 가볍고 강해서 항공, 자동차 산업에 이용된다. 물의 깊이가 가장 얕은 분지 남쪽에서는 이스라엘 쪽이나 요르단 지역 할 것 없이 대규모로 소금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채굴의 목적은 식용 소금 생산이 아니라, 비료 생산을 위한 카날라이트라는 가성 칼륨 물질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세계 8대 가성 칼륨 생산국이다. 다른 국가들은 지하 광산에서 채굴되는 반면, 이곳에서는 바다에서 직접 채굴한다. 또한 사해 부근에는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이 확인되어, 향후 천연가스 개발이 계획되고 있다.

     

 반건조 지역인 요단강은 요르단의 최대 담수원이다. 요단강 유역은 특히 요르단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지역이다. 요르단 인구의 75%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고 농업도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문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많은 물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시설의 부족으로 낭비되는 물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엔 물 부족에 따라 농업인들이 생산 방식을 바꾸었고 오늘날에는 물을 절약하는 방식이나 온실 재배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처럼 사해의 물을 과도하게 이용하고 있어서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호수를 이루었던 사해는 현재 두 부위로 나뉘어 있다. 북부는 넓고 수심이 깊으나 남부는 소금 생산을 위한 염전이 조성되어 있다. 사해가 이렇게 두 구역으로 나뉘게 된 건 해수면 하강 때문인데, 최근에는 매년 1m씩 해수면이 낮아지고 있어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사해에 있는 관광단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수면 바로 앞에 있었지만, 사해가 계속 축소되어 지금은 2km의 거리를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며 계속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사해의 해수면이 낮아지는 것은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수면의 하강은 사해에서의 작업뿐만 아니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요단강 상류에 대규모 관개 사업 시행이 주요 원인이다. 이스라엘은 1950년대 토지를 관개하고, 4개 사막에 물을 공급할 목적으로 갈릴리 호수에 댐과 운하를 건설했다. 이와 동시에 이웃 국가인 요르단도 요단강의 주요 지류에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농업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며 해수면 하강은 가속화됐다. 요단강 주변에 증가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요르단 정부도 여러 개의 댐을 세웠다. 이스라엘도 역시 댐을 건설해 나갔다. 이처럼 요단강 상류와 하류에서 물을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50년 이내에 사해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단강으로부터 취수량을 줄임으로써 사해 해수면의 하강을 늦출 수 있다. 사해 해수면이 낮아지면 주변 토지에도 영향을 미쳐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물 부족에 시달리는 이 지역에서는 상당히 큰 문제이다.

     

 해수면 하강으로 인해 대두된 다른 문제가 있다. 사해 연안 곳곳에 지면이 꺼지는 싱크홀이 형성되고 있다. 20년 전엔 사해였던 곳이 해수면이 낮아져 빗물이 이곳의 소금을 녹이면서 싱크홀이 생겼다고 추정된다. 이 현상은 이스라엘 지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 싱크홀의 형성으로 캠핑장, 야자밭, 해수욕장의 상당수가 폐쇄되었다. 그 해결책으로 아카바만에 있는 홍해의 물을 사해로 끌어오는 운하를 계획하고 건설을 실행하고 있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심사숙고해서 실시하는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사해의 해수면 하강을 막고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물의 일부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용수로 공급하고 나머지는 사해로 유입시키려 한다.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건설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 실행으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전쟁을 치르던 관계였으나, 양국이 협력하게 되었다.

     

 사해에는 들어오는 곳은 있으나 빠져나가는 곳이 없다, 사해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가면 고원지대에 예루살렘이 나온다. 그 예루살렘 옛 성에 출입하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영어로 Dung Gate, 한자어로 분문(糞門)이라는 출입구가 었다. 옛날에 예루살렘 성내의 쓰레기나 오물, 분뇨 등을 성 밖으로 반출하여 기드론 골짜기에 버리기 위해 이용하는 성문이다. 이 성문은 힌놈의 골짜기로 통하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문으로 오늘날 통곡의 벽 근처에 있다. 우리의 옛 한양 도성에서는 청계천을 조성하여 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가는 문이 있었는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지금의 동대문 아래에 있는 광희문(光熙門)이 있었다. 일명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쪽의 시구문을 나온 장례 행렬은 요즈음의 신당동(新堂洞) 혹은 행당동(杏堂洞)에 있는 신당(神堂)에 가서 제를 올리고 정해진 장지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 지역에 왕십리(往十里), 답십리(踏十里) 등의 지명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 한양 중심에서 십리(十里) 즉 4km쯤 떨어져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옛날에 논이었을 이 일대가 오늘날에는 모두 주택가나 상가로 바뀌고 지하철이나 전철이 다닌다. 신답(新踏)이니 용답(龍踏)이라는 역명이 존재한다. 답(踏) 자는 다리 족(足) 변에 논 답(畓)인데 논이 있는 벌을 직접 다리로 걸어서 돌아본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각종 모임에서 어디를 가게 되면 실무진들이 미리 해당 지역을 답사(踏査)한다.

      

 사해의 북쪽 서편 연안에 쿰란(Qumran)이라는 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금세기 성서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인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다. BC 200년에서 BC 100년 사이에 쓰인 쿰란의 구약성경 사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본보다 무려 천 년 이상 앞섰다고 추정된다, 여러 문헌을 통하여 볼 때 쿰란에 있었던 공동체는 당시 예루살렘 중심의 정통 유대교와 결별한 채, 사해 근처에서 수도원 형태의 공동생활을 하며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문서를 작성하고 히브리어 성경을 직접 필사하여 보관하였다. 이 공동체는 유대인 전쟁 초기인 68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로마 군대의 공격을 예상하였던 쿰란 사람들은 보관 중이던 문서와 성경 사본들을 항아리 속에 담아 근처의 동굴 속에 감추어 두었다. 아마도 그들은 로마 군대가 떠나가면 다시 돌아와 숨겨 두었던 문서들을 되찾으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못하였고 감추어 두었던 문서들은 2,000년 가까이 동굴 속에 있다가 1947년 한 양치기 소년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쿰란 근처는 황량한 사막지대이고 이곳의 남쪽에는 큰 규모의 오아시스가 있다. 이곳에서도 쿰란과 거의 같은 시기의 건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두 곳이 긴밀하게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해 서쪽 쿰란과 마사다 중간에 엔게디(Ein Gedi)라고 있다. 엔게디는 ‘새끼 염소의 샘’이란 뜻으로 풍부한 수원을 갖고 있는 오아시스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사무엘상 23장 29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 다닐 때 그는 ‘엔게디 요새’에서 숨어 지냈다. 그다음 구절인 사무엘상 24장 1절에서는 이곳을 ‘엔게디 황무지‘로 칭하는데, 이 지역이 유다 광야에 속하는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면서 다윗이 숨어 있던 동굴로 들어왔다. 이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이유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은 엔게디 동굴에서의 경험을 시편 142편에서 표현하고 있다. 아가서 1장에 의하면 엔게디는 고대로부터 아름답고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였다. 엔게디는 광야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있는 산지로 올라가는 광야길의 입구이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유다 왕국 여호사밧 통치 시대에 요단강 건너 고원지대에 있던 압몬과 모압은 유다 왕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광야길 곧 엔게디를 거쳐 산지로 올라왔다.

     

 사해 북단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여리고(Jericho)는 이미 BC 8,000년경에 정착 사회를 이루었다고 추정된다. 해저 200여 m의 요단강 계곡에 자리 잡은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여리고는 매우 건조한 사막에 가까운 지역이나 세 군데의 오아시스를 가지고 있어서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여리고가 묻혀 있는 언덕 아래에는 '엘리사의 샘'으로 알려진 물 근원이 있다. 열왕기하 2장 19~25절에서 엘리사는 여리고 주민들을 위하여 이곳 샘에서 나오는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켰다. 여리고 앞쪽에는 사해로 유입되는 요단강 하구가 있다. 이 강을 중심으로 양편에 여리고 평지와 모압 평지가 자리하고 있다. 모압 평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신약시대 세례 요한은 이 근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도 이곳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현재 여리고 앞쪽의 요단강에는 알렌비 다리가 놓여 있어서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 예수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올라갈 때는 여리고를 지나갔다. 이곳에서 그는 소경 거지의 눈을 고쳐 주었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Zacchaeus)를 만났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가 여리고에서 삭개오(Sergio)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자 하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서 뽕나무에 올라가서 보는데 예수께서 올려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留)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뽕나무라고 번역된 나무는 일종의 무화과나무(sycamore fig tree)로 나무에 올라가 그 열매에 침을 주어야 숙성되어 나중에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구약성서 아모스 7장 14절에 아모스가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라고 대답하는 구절이 나온다. 해당 부분을 영어 성경에 보면 'I was a shepherd, and also took care of sycamore fig tree'라고 되어 있다. 아모스의 직업은 목동이요 요즘 말로 second job으로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열매에 침을 주는 알바를 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당시 그 지방의 관습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늘날도 여리고의 길가에 그와 같은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위의 사진은 그중의 하나이다.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갈 즈음이 무화과나무 열매에 침을 주는 시절이라 큰 무화과나무에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즉 내세울 것 없는 삭개오가 익명성을 보장받기 위하여 나무에 올라가 있는데,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예수가 어서 내려오라고 하며 삭개오에게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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