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이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을 뜻한다. 원어 Via Dolorosa는 ‘고통의 길’이라는 뜻이다. 일반인들도 자기가 지은 죄가 없는데도 받는 고통이 있으면 십자가를 진다고 말한다. 아마도 요즈음 유행하는 꽃길의 반대말 정도 될 것이다. 위의 예루살렘 지도에서 십자가의 길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안토니아 성부터 성묘 교회까지 600m 정도 된다. 현재 이 길은 성지순례 코스가 되어 있으며, 예수가 지나가다 발생한 사건을 기준으로 8개의 이정표가 있다. 지금은 이 길이 주택가나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 골목이 되어 있고, 어느 구간에서는 길이 없어져서 돌아가야 한다.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에서는 부활절 때에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가 봉헌된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성로선공(聖路善功)'이라고 불렀다. 이 기도는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 성지순례가 어려워지자, 현지에 가지 않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방도로 만들어졌다.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보통 벽면에 조각 또는 그림으로 14처가 그려져 있거나, 옥외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경기도 안양시와 군포시 사이에 있는 수리산 성지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걸어 다니기에도 숨이 찬 비탈길에 있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는 다음과 같다. 제1처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음, 제2처 예수가 십자가를 짐, 제3처 예수가 기력이 떨어져 넘어짐, 제4처 예수가 모친 마리아를 만남, 제5처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짐, 제6처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음, 제7처 기력이 다해 예수가 두 번째 넘어짐, 제8처 예수가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함, 제9처 예수가 세 번째 넘어짐, 제10처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함, 제11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 제12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음, 제13처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제14처 예수가 무덤에 묻힘. 천주교 신자들은 각 처를 이동하면서 해당하는 묵상 기도문이나 성경 구절을 읽고,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등을 부른다.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은 덩치가 매우 컸다고 하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시몬은 남은 삶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죽기 직전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 일곱 번을 말했는데 이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한다. 첫 번째,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두 번째, 누가복음 23장 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세 번째, 요한복음 19장 26~27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네 번째, 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섯 번째, 요한복음 19장 28절 내가 목마르다. 여섯 번째,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누가복음 23장 46절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골고다(Golgotha) 언덕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장소이다. 골고다는 아람어로 해골, 두개골을 의미한다. 일명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해골이란 말에서 유래한다. 이곳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자리라고 전해 내려온다.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언덕이 있는 곳이나 캠퍼스 자체가 언덕 위에 있으면 별명으로 골고다가 붙는 경우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무덤에 매장되었다가 사흗날에 부활했다는 그 자리에 지금은 성묘 교회가 세워져 있다. AD 325년경에 로마 황제의 모친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하다가 발견한 예수의 빈 무덤 자리에 이듬해 로마 황제가 성당을 짓게 하였다. 이후 파괴와 재건축을 거쳐 오늘날까지 1,600여 년이 넘도록 교파를 가리지 않고 세계 각지의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성지순례의 단골 코스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장소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고 주변은 시장과 모스크로 둘러싸여 있어 부지도 협소한 상태이다. 매년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비교하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인데,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을 놓고 공방전을 반복하면서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성묘 교회의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독교계 여섯 개 종파가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1852년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에서 기독교 종파별로 성묘 교회의 구역을 나누어 맡게 한 후 지금까지 이어진다. 개신교는 여기서 구역을 배정받지 않았는데, 개신교 전체를 대표할 만한 교단도 없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개신교인의 수가 적어서 고려 대상에서 빠져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도 일반 개신교 신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성지순례로 방문하고 있다. 실제로 개신교 성지순례객들은 교파 간에 각축전이 험악하게 벌어지는 성지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꽤 자유로운 편이다. 종파 문제 때문에 어느 부분이 낡아 고치려고 해도 다른 종파 구역을 넘어서기에 제대로 고치지도 못하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 2층의 창 앞에 나무 사다리 하나가 외벽에 걸쳐 있는데, 이 사다리를 치우자는 종파 간 합의가 없었기에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남아 있다. 1757년 ‘현상 유지(Status Quo)’가 발효된 이후로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다. 30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부동의 사다리(Immovable Ladder)'라고도 불린다.
정면의 현관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닳아서 윤이 나는 붉은색 대리석 하나가 깔려 있는데, 이 돌판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이곳에 눕히고 향유를 바르며 염한 성유석(聖油石, the Stone of Anointing)이다. 성유석 뒤에는 그 내용을 묘사하는 모자이크 성화가 있다, 이 돌 위에서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는 전승은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알려진 것으로,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유석은 1810년에 깔았다. 그럼에도 종교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성유석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뿌리는 성유를 손수건이나 천에 적셔 가져가려는 순례자들로 항상 붐빈다. 각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은 자기 나라의 말로 자신의 종교적 의례에 따라 성묘 교회 안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다. 참으로 시끄럽고 요란한 실내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