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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23. 2024

E24. 이생의 길

 위 사진은 현재 이스라엘의 중요 도시와 그 도시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를 표시한 것이다. 다윗이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가운데서도 새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을 삼은 이유 중의 하나가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이 지도에서도 나타나듯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영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남북 및 동서 간선도로가 교차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지중해 해안을 끼고 ‘해안길(Via Maris)’이 개척되었는데 이 도로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중심도로가 되어 인적 및 물적 교류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팔레스타인의 해안지역을 통과하는 이 도로는 갈멜산, 이스르엘 계곡, 갈릴리 지역, 그리고 골란고원을 거쳐 다메섹으로 연결된다. 청동기 시대부터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곡식과 과실을 경작하면서 동시에 양과 소 떼를 길렀다. BC 18세기에 이르러 근동지역에 대규모의 이주 물결이 지나갔다. 이 이주 물결은 북쪽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고 더 나아가 이집트에 힉소스라는 외국 정복자들의 통치 시대를 가져왔다. 힉소스(Hyksos)가 전쟁에 도입한 기술적인 혁명은 말과 전차를 이용한 철병거(鐵兵車)였다. 철기 기술을 습득한 블레셋 민족(Philistines)이 후대에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힌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나온다. 즉 블레셋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히브리 족장들이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 히브리인이었던 아브라함과 그의 식솔들은 이동하며 생활하는 반유목민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거주의 권리를 얻고자 여러 노력을 하였다. 그의 아들 이삭은 네게브 땅에서 농사를 지어 거부가 되었다. 제3세대인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스스로 가나안 지역의 완전한 주민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주로 ‘산지길’을 선호하였다. 산지에는 각 지역을 잇는 ‘족장의 길’이 예부터 있어 왔다. 이 길은 비교적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을 지나는 도로로서, 해안평야지대의 풍요한 도시들과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지금은 위 지도에 나와 있는 길 이상으로 거미줄처럼 각종 도로가 뚫어져 있을 것이다. 특히 비포장 군사 도로나 지방도로가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의 요르단 지역에는 예로부터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라는 길이 개척되어 이 일대의 교류를 동서남북으로 촉진하였다. 이 길은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에 연결되어 아랍계 유목민인 나바티안족(Nabatean)이나 베두인족(Bedouin)의 낙타를 이용하는 대상로(隊商路)가 되어 동부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국제무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왕의 대로’ 근처에 천연요새인 페트라(Petra)와 옛날에는 길하레셋(Kirhereseth)이라고 불린 카락(Karak) 성(城) 같은 도시가 발달하였다. 후세에 이 지역에서 페르시아가 득세한 이후에는 밀려난 나바티안족이 유다 남부 네게브 사막 지역에 정착하면서 도시들이 세워졌고 물을 저장하는 기술이 크게 발전되었다. 이 물을 사용하여 생산된 농산물들은 네게브 지역을 지나가는 대상들에게 판매되었다. 대상로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왕의 대로’를 스페인어로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이라고 한다. 미국 서부의 산호세(San Jose) 근처 실리콘 밸리 지역에 ‘엘 카미노 레알’이라는 도로가 있다. 뒤에 더 좋은 고속도로가 이 길과 평행하게 생겼지만, 이 길은 아직도 로컬 도로로서 크게 기능하고 있다.

     

 동서양을 잇는 길로서 역사적으로 비단길(Silk road)이 유명하다. 실크 로드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명적 혹은 기술적으로 우위인 중국과 후발인 유럽을 이어 주는 도보 길이었다. 중국에서는 누에의 나방으로부터 실을 뽑아 옷을 만드는 견직물 기술이 발달하여 질 좋은 비단을 만들 줄 알았으나, 유럽에서는 비단옷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그 원료가 되는 비단을 만들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그 비단을 구하거나 판매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주로 걸어서 왕래하는 길을 개척하였는데, 그 길을 후세 사람들이 실크 로드라고 이름 지었다. 나중에는 중국의 도자기나 기타 관련 기술을 거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중국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길은 중앙아시아의 고원지대와 사막지대를 통과해야 하는 험난하고 먼 길이었는데 도보와 마소, 낙타 등을 이용하여야 한다.     

 문헌상으로 이 실크 로드의 일부를 오래전에 여행한 사람이 우리의 조상인 신라의 혜초(慧超, 704~787)이다. 그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발견되어 동서 교섭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되고 있다. 혜초가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723년에 당나라의 광저우에서 시작해 해상으로 수마트라와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 등 40여 개국을 거쳐 727년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혜초는 한반도 태생으로는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다녀온 사람인 셈이다.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 3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았는데, 1906~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중국 간쑤성(甘肅省)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석굴에서 구매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사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혜초는 여행을 마치고 787년까지 당나라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많은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다가 입적 즉 사망하였다.

     

 유럽인으로서 실크 로드를 최초로 여행한 사람은 문헌상으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이다. 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 사람으로, 17세 무렵에 고향을 떠나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탐험하고, 1292년에 귀환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숙부와 함께 당시 중국인 원나라에 도착한 후 하급 관리로서 원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17년 동안 여러 도시를 돌아봤는데, 몽골, 미얀마, 베트남까지 다녀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노바 전쟁에 출전하였으나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 거류 시절의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구술하였는데, 이때 수감 중이던 한 작가가 그의 여행담을 기록한 책이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언어, 종교, 산물, 동식물 등을 서술한 이야기책의 성격을 갖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이 책의 작가가 아니어서 '마르코 폴로는’으로 시작하는 3인칭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또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이므로 최초 출간 이후에 여러 언어로 수많은 판본이 만들어졌다.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았거나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라는 추정도 있다. 현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일부 과장된 부분들은 마르코 폴로가 일부 특정 지역에 대해 자신의 희망 사항 등을 덧붙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먼 지역을 직접 발품을 팔거나 말이나 낙타의 도움을 받아 갔다. 그때는 길이 그다지 넓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군사용 도로는 넓고 곧아야 했다. 로마 제국은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만들었다. 우선 마차나 전차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어야 했고, 많은 병력이 빨리 움직여야 하므로 직선으로 도로를 만들었다. 강이나 계곡에서는 길과 같은 높이로 다리를 만들어 도로를 연결하였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도로가 관개수로와 같이 가도록 수도교(水道橋)를 건설하였다.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일반인과 병력이 도로에서 뒤섞이지 않도록 인도를 도로 옆 양편에 따로 만들었다. 로마 가도의 대부분은 전부 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또한 도로의 유지, 보수가 쉽도록 빗물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는데 도로 중앙부는 높이고 가장자리는 낮게 아치형으로 만들어 비가 오면 빗물이 가장자리로 고이도록 만들었다. 도로 가장자리에는 배수구를 만들었다. 또한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포장의 최하층에 자갈을 깔았다. 아울러 도로 주변의 나무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지하로 뻗는 수목의 뿌리가 도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아 도로의 바로 바깥쪽에 나무 심기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키가 크고 가지가 많은 나무를 심어 이동하는 병사들이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도록 하였다. 아피아란 명칭이 정치가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과 그 나무의 이름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과 같이 로마는 제국의 통치를 위하여 로마를 중심으로 아주 체계적인 도로망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로마의 도로 건설 공법이 유럽에 그대로 전수되고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최근에 독일은 아우토반(Auto Bahn)이란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자동차 전성시대를 열었고, 미국은 전국에 거미줄 같은 하이웨이(High Way)를 건설하여 넓은 국토를 연결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좁은 국토지만 지도자의 혜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산업의 발전과 국력의 신장을 도모하였다.

     

 여태까지의 이러한 길은 모두 육지에 건설하였고 그 형체가 우리 눈에 보인다. 그러나 배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등장하고 바다를 이용하여 항해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뱃길의 중요성이 커졌다. 나일강과 같은 강을 운항하는 배는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만, 망망대해에서는 배가 지나는 길은 금방 없어진다. 이를 위해 나침반이 발명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뱃길은 있다. 또한 비행기가 나는 하늘에도 하늘길이 분명히 있다. 방위와 고도로 가는 길을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를 무시하면 비행기끼리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방위에 의존하다 보니 지상에서 자동차 운전 시에도 우리는 내비게이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이제 우리 모두 가는 방향을 모르는 길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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