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유다 지파 훌(Hur)의 손자요 우리(Uri)의 아들인 브살렐(Bezalel)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Ahisamach)의 아들 오홀리압(Oholiab)을 세워 그와 함께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찌니.’ (구약성경 출애굽기 31장 1~6절)
필자는 대학교 갈 때 포항제철의 고로가 준공되어 쇳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혼자 힘으로 금속공학과(金屬工學科)를 선택하였다. 고등학교 때 화학은 암기가 많았고 물리는 원리 이해가 중심이었는데 나의 성적은 화학 과목이 더 위였다. 물리 선생님은 내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고 하니까 너는 화학을 잘하니 잘 선택했다고 말씀하셨다. 197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고 2학년부터 전공과목을 공부하는데, 선배들이 칠판에 금속(禁俗)이라고 한자로 써서 무언가 특별한 게 금속공학과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영어로 금속공학을 Metallurgy라고 하는데 야금학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Metallurgist는 야금학자라고 번역하는 게 무리는 아닌 듯싶다. 공부하는 교과목은 크게 물리야금과 화학야금으로 분류되었다. 화학야금 과목은 주로 광석을 채취하여 금속 원소를 뽑아내는 과정을 다루고 물리야금 과목은 고체인 금속에서 원자 구조와 재질의 상관관계를 주로 취급하였다. 3, 4학년 여름방학 동안에 포항제철과 인천제철에 실습을 나가서 제철공장 현장을 경험하고 내 적성에 맞지 않음을 발견하여 졸업하면 공장 근무보다는 연구 개발 분야에서 일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고체물리학의 영향으로 금속, 산화물, 심지어 고분자 플라스틱까지도 모두 고체로 통합하여 재료과학 및 재료공학(Materials Science & Engineering)이라는 명칭이 유행하였다. 물리야금이나 화학야금이란 용어가 무색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KAIS)의 석사과정에 재료공학과가 있었다. 당시에 그곳에서 2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국가기관에 근무하면 군대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재료공학과 분말야금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바로 옆의 한국과학연구소(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IST)에 들어가서 재료시험실과 철강재료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4년여 후인 1982년 미국의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는 나름대로 업계의 동향을 파악한 터라 용접공학이나 전자재료를 전공하면 귀국하여 좋은 조건의 직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MIT의 학과 이름은 재료과학 및 공학과(Department of 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이었다. 탐색과 교수 면담을 거쳐 전자재료 연구팀에 합류하였다.
약 5년여 동안 반도체 재료인 GaAs의 열처리와 결함의 상호작용에 관한 실험과 연구를 수행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졸업에 즈음하여 미국의 대기업 연구소와 학교 근처의 소기업에 취직을 시도하여 보았으나 영어에 자신이 없었고 입사 후에 일을 잘할 자신이 없었다. 마침 대우 그룹에서 반도체 인력을 뽑는다는 연락이 와서 대우 뉴욕 지사에 가서 김우중 회장과 면담하고 대우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반도체 산업의 초창기인데 대우 그룹에서 미국 산호세에 있는 ZyMOS라는 소형 종합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고 거기서 일할 인력을 뽑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1987년 11월에 입사하고 보니까 자이모스의 공장인 반도체 제조시설(FAB)을 한국의 대우통신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잡아놔서 미국 현지에서는 6개월 동안 연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어쨌든 6개월 정도 실리콘 밸리에 머문 후에 보스턴 MIT 졸업식에 참석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도입하는 설비와 새로운 설비를 설치할 새로운 FAB이 건설되고 새로운 조직이 꾸려졌는데 필자는 그 책임을 맡는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자체적으로 설계한 비메모리 반도체 제품이 없어서 새로운 FAB에 설비를 설치하고도 생산할 제품이 없었다. 당시에 5인치나 6인치 실리콘 웨이퍼 FAB이 주류인 시절에 4인치 FAB이라는 불리가 작용했으나 자체 제품이 없다는 게 가장 안타깝게 느껴졌다. 결국 일본의 소규모 반도체 회사를 상대로 웨이퍼 파운드리(Wafer Foundry) 영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부하 직원들의 도움이 컸다.
이렇게 파운드리 관련 영업과 기술을 담당하면서 일본에 자주 출장을 가고 5년이 지난 후에 이사(부)로 진급하고 영업 담당 이사로 자리를 바꾸었다. 영업부장 시절에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에 출장을 다니면서 나름대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 뒤 대우 그룹 내에서 반도체사업부의 소속이 대우통신에서 ㈜ 대우로 다시 대우전자로 바뀌었다. 대우전자 시절인 2000년에 유럽의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인 STMicroelectronics와 합작 법인으로 대우에스티반도체설계(DSSD) 주식회사를 서울에 설립하고 필자는 그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우 그룹이 공중 분해되면서 합작 법인이 정리되고 필자는 그 회사의 장비와 인원을 중심으로 2001년에 벤처회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경제 위기 극복 방안으로 벤처기업 설립이 붐이었으나 필자의 경험 부족과 비메모리 반도체 제품의 고질적인 문제로 회사가 어려웠다. 1년여 만의 노력 끝에 회사를 정리하고 국책사업을 관리하는 KIST의 나노소재기술개발단의 기술기획팀장으로 옮겨 갔다가 2004년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2020년 3월에 그 학교에서 정년으로 퇴임하였다. 은퇴 후 3년을 퇴직자로 보내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출판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책을 발간하였다.
이상으로 자신이 브살렐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필자의 직업적인 일생을 요약해 봤다. 위에 인용한 한글 성경 구절만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재료공학 연구자의 조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면 이들은 회막(會幕, Tent of Meeting)과 거기에 필요한 성물(聖物)의 디자인과 제작을 책임지고 있다. 요즘의 직업으로 치면 조각가나 공예가처럼 미술 분야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디자인과 제작을 위해서 드는 원재료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필자의 세대는 가난하여 미술 등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학과 공부만 했지만, 필자의 밑 세대를 보면 미술이나 음악적인 예술 분야의 재능이 있어 보인다. 필자의 장남은 전자공학을 공부하여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지만 차남은 만화 그리는 손재주가 있어서 웹툰 작가로 직업의 길을 잡고 있다. 외삼촌이 손재주가 있어 나무로 된 도장을 직접 파서 썼고, 이종사촌 중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있고, 외사촌의 자녀 중에 음악적 소질이 보인다. 우리 가계에 예술적인 DNA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필자도 지금까지 공학을 공부하고 그 기술로 생활을 영위했지만 글 쓰는 재주가 있는 것을 보면 이과보다는 문과의 재질이 더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