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0. 색즉시공(色卽是空)
원자는 비어 있다.
한자로 색(色)은 색깔의 뜻 외에도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남색, 색골, 색기 등에 성(sex)에 관계되는 말로 ‘색(色)’이 쓰이고 있다. 또한 지방색, 성깔, 각양각색(各樣各色) 등의 말에서 보듯이 사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쓰이고 있다.
시사적인 말로 색깔론이라고 있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정열적이고 육감적인 느낌을 주어서인지 선동적인 정치적인 구호와 함께 사용되어 왔다. 레닌의 공산주의 깃발이 빨간색이다. 냉전 시대에는 한동안 오성홍기, 적위대, 빨갱이, 적화통일, 새빨간 거짓말 등 우리에게 부정적인 단어들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붉은색으로 하면서 우리들의 인식에 변화가 왔다. 우리 정당의 색깔에도 붉은 계통의 색을 쓰기 시작했다.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불경 <반야심경(般若心經)> 중 일부
이 글귀는 260자로 된 불교 경전인 <반야심경>의 일부라고 한다.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하고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한다.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어 곧 한자로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으므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요약한 것이다. 원어를 한자로 직역을 하면 제대로 된 해석이 안 나온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한자로 된 <반야심경> 역시 번역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지만 그 뭔가가 뭔지를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게 이 말의 포인트이다.
‘색즉시공’이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면서 본래 의미와 달리 야한 느낌이 들게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색즉시공'의 제일 황당한 해석이 바로 '섹스는 허무한 것이다. 운운' 하는 것이다. 어느 일본 만화 번역판에는 ‘색깔은 즉 하늘이요 하늘은 즉 색깔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공(空)이란 한자가 일본어에서 '하늘'이란 뜻이라서 번역자가 불경을 몰라 생긴 오역이다. 이 구절에서 색(色)은, 색깔이나 섹스가 아니라 '흔히 생각하는 물질을 포함한 실체가 있는 모든 현상'을 말한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공(空)을 텅 비어 있다는 식으로 쓰고 있어서 흔히 세상을 허무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색'은 물질로 이뤄진 몸인데, 이것이 모두 공(空)하다는 의미다. 공(空)과 무(無)를 혼동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무(無)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고, 공(空)이란 어떤 존재가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해석으로는 색(色)을 '존재'로, 공(空)을 '변화'로 해석해서, ‘존재하는 모든 건 변화하며, 변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색즉시공’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 등이 불교적인 심오한 뜻도 가지고 있다는 걸 대중적으로 호소하는 경우로 잘못된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한자어 색(色)은 물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물질화되어 펼쳐지는 현상을 뜻하며 공(空)은 물질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지 않는 상태로서의 비어 있다는 개념이 아닌 법공(法空)을 뜻한다고 한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에서 유래된 자연과학은 기원전 4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대의 원자 모델에 따르면, 통상적인 물질은 대부분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데, 원자의 크기는 대략 10의 -10승 m이고 원자핵의 크기는 대략 10의 -15승 m로서, 대략 10만 배 정도 차이가 난다. 사실상 원자의 크기에 비해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엄청난 거리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주위에 보이는 모든 물체는 태양과 지구 간의 간격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전기를 띤 조그만 입자들의 단순한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실질적인 물질들인 모든 전자와 원자핵들을 한 덩이로 뭉칠 수만 있다면 우리 몸은 겨우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점으로 줄어들어 버릴 것이다. 지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원자핵과 전자들을 뭉쳐 놓으면 아파트 한 채 정도가 된다.
현대 자연과학의 해석대로 공(空)을 에너지로, 색(色)을 물질로 생각한다면 색즉시공의 본뜻에 가까워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대로 에너지와 물질이 상호변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면, ‘물질이 곧 에너지요, 에너지가 곧 물질이다.’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원자에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원자 내 비어 있는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에너지 집합체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