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7. 수선화
Daffodils, Narcissus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 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집(創作集)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小曲),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김동명, <수선화>
위 김동명(1900~1968)의 시 <수선화>는 우리에게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의 가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동진은 초등학교 시절 김동명 선생의 제자로 평생 시인의 시를 외우고 다녔는데, 어느 날 악상이 떠올라 바로 <수선화>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가곡 <수선화>는 멜로디가 아름다워 그 선율에 그만 취해버리는데,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참 듣기 좋다. 수선화는 많은 라디오나 TV 드라마, 영화, 만화 속에 캐릭터로 쓰여 왔다.
그렇다면 수선화는 어떤 꽃인가? 추위에 강해 가을에 비늘줄기 형태의 구근(球根)을 심으면 땅속에서 겨울을 나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노란색 꽃이 제일 친숙하나 흰색 계통도 있다. 위 사진은 필자가 경기 남부의 어느 산사에서 이른 봄날에 피워 오른 수선화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수선화는 한국, 중국, 일본, 지중해 연안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 네덜란드에서 화초로 품종개량이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육성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화단용으로 이용되는 방울수선의 일종인 제주수선이 있다. 제주도에서는 설중화(雪中花)라고도 불린다. 눈이 오는 추운 날씨에도 피어나는 꽃이라는 의미이다. 제주도에선 눈 오는 12월에도 수선화가 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가 제주로 유배 갔을 때 육지에서 귀한 수선화가 제주도에선 소도 안 먹는 잡초로 널려있는 것을 보고 귀한 것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천대받는다며 놀랐다고 한다. 아마도 제주도에 갇혀버린 자신의 처지를 보는 듯해서 더욱 씁쓸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 사이에 수선화가 인기가 좋아서 중국에서 그 구근(球根)을 수입해 왔다고 한다.
김동명의 원시(原詩)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이란 구절이 나와 수선화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고, 마지막 구절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에서는 추운 겨울을 나는 수선화가 마음에 와닿는다. 한자어로 수선화(水仙花)는 물속에 있는 신선이라는 뜻일 것이다. 수선이라는 이름처럼 자라는 데 물이 많이 필요로 한다. 수선화가 영어로는 Daffodils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청년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나르키수스(Narcissus)라고도 부른다. 신화에 따르면 나르시스라는 청년이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하여 물속으로 들어가 빠져 죽었는데, 그곳에 수선화가 피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에 유래하여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自己愛), 자존심, 고결, 신비, 외로움이다. 나르시시즘이란 정신분석학 용어도 여기서 생겨났다. 누구나 제멋에 산다.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애랄까 고집이 생겨서 자기 생각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 시대의 시인 정호승(1950~ )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인의 말대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외로움을 견딘다는 말일 것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중에서
영국의 계관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도 수선화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서정시를 남겼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로 시작되는 이 시는 구름처럼 외롭게 걷다가 발견한 수선화 무더기로 인하여 시인의 마음이 춤추듯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골짜기와 언덕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나는 외롭게 거닐었네.
돌연, 나는 한 무더기의
무수한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네.
호수 옆에서, 나무들 아래에서,
산들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춤추고 있었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 워즈워스, <수선화(Daffodils)>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