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던 한겨울이 지나고 따사로운 봄바람이 불면, 우리 주위에서 제일 먼저 나무에서 피는 꽃이 산수유꽃이다. 산수유(山茱萸)라는 이름 뒤에 있는 두 한자는 어려운 말로써 이 나무의 열매를 표현할 때 특별히 쓰는 것 같다. 위 사진은 필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건물 사이의 공터에 서 있는, 꽃피기 시작하는 산수유나무를 촬영한 것이다. 나무의 가지마다 다닥다닥 조그맣게 노랗게 피는 꽃이 참 신기하다. 이 꽃의 꽃말이 ‘영원불변’이라고 한다. 나무가 장수하고 해마다 봄 되면 꽃이 피니까 과히 영원불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산수유는 장수와 용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꽃의 선명한 노란색은 충성심과 순결함을 상징한다는 말도 있다. 요즈음은 밝은 노란색과 향기로운 향기로 인해 꽃꽂이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산수유의 다섯 꽃잎은 부귀, 건강, 장수, 덕, 활력의 다섯 가지 축복을 상징한다고 한다.
산수유는 우리나라 토종이 아니고, 열매를 약재로 쓰기 위해 중국에서 도입한 외래종이다. 주로 동네 빈터나 길옆에 심어 길렀다. 전라남도 구례군, 경기도 양평군, 경상북도 의성군 등 산수유 군락지인 일명 ‘산수유 마을’에서는 봄이면 노란 산수유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어서 ‘산수유 축제’라는 이름으로 상춘객들을 불러 모은다. 산수유처럼 요란스럽지는 않더라도 봄이 오면 산골짜기마다 노랗게 피어 봄소식을 전하는 나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강나무’이다. 앞의 ‘16. 동백꽃’ 편에서 소개한 대로 김유정의 소설에 ‘동백꽃’이라고 있다. 이는 강원도 지방에서 ‘생강나무’ 열매로 짠 기름이 여인네들의 머릿결을 가꾸는 데 쓰이는 남도의 동백기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나무는 구별이 쉽지 않을 만큼 노란 꽃을 초봄에 피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식물학적으로 산수유는 ‘층층나무과’,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한다. 산수유는 산이나 들 혹은 마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으나, 생강나무는 산지의 계곡이나 숲 속의 냇가에서 자생한다. 두 나무의 정체를 자세히 파악하려면, 찬찬히 꽃송이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꽃자루가 길게 뻗어 나와 그 끝에 봉오리가 맺혀 있으면서 꽃자루 부분이 온통 노란색이면 산수유이고, 꽃자루 부분이 짧아 가지에 덕지덕지 붙어 있고 꽃자루 부분 또한 푸르스름한 녹색을 띠고 있으면 생강나무이다. 새로 난 가지를 잘라서 냄새를 맡으면 생강 냄새가 나므로 생강나무라고 한다.
이른 봄에 나뭇가지에서 노랗게 움이 튼 꽃은 곧 열매를 맺는다. 파란 잎이 돋아나고 기온이 올라가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뿌리로부터 빨아올린 물을 가지고 잎에 있는 엽록소에서 광합성을 하여 영양분을 잎에 공급하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또한 그 영양분이 열매에도 공급되어 열매가 자란다. 여름에 파란 산수유나무 열매는 길쭉하고 가을에 붉게 익는다. 생강나무 열매는 둥글고 검붉게 익는다. 둘 다 꽃은 관상용이고, 열매에서는 기름을 짠다. 산수유 열매에서 씨를 발라내고 햇볕에 말린 과육을 생약명으로 석조(石棗), 촉조(蜀棗), 육조(肉棗)라고 한다. 이것을 빻아 가루로 직접 복용하기도 하고 설탕과 함께 소주에 담가 술을 만들어 먹거나 물에 달여 차로 마신다. 한방에서는 두통이나 이명, 해수병, 해열 등에 약재로 쓰며 민간에서는 식은땀, 야뇨증 치료 등에 쓴다. 생강나무껍질을 한약재로 쓰는데, 타박상의 어혈과 산후에 몸이 붓고 팔다리가 아픈 증세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산수유나무 열매는 귀중한 한약재로 일부 산간마을에서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가을에 빨간 열매를 따서 밤새도록 여인들이 입으로 씨를 발라내고 모은 과육을 팔아서 자식 교육과 가계 유지에 효율적으로 사용하였다. 따지 못한 열매는 겨울에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일손도 부족하고 경제성이 맞지 않아 산수유 열매를 그대로 두어 새봄이 되면 산수유나무 밑에 마른 열매가 떨어져 쌓여 있다. 산수유는 꽃을 보기 어려운 때에 노란 꽃망울을 일찍 터뜨려 봄이 왔음을 알려 줄 뿐 아니라 흰 눈으로 뒤덮인 삭막한 겨울철엔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정경이 아름다워 요즈음 공원이나 정원의 조경수로 각광(脚光) 받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거리에는,
이제 소리 없이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인가.
김종길, <성탄제>
이 시는 김종길(1926~2017) 시인의 대표작으로 열병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눈 속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구해 오신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이 들어 기억하는 시인의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어렸을 적에 기억된 단상이 지금은 안 계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더해 간다. 마지막 연의 시구(詩句)에서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본명이 김치규(金致逵)인 김종길 시인은 영문학자이면서 고전적 소양에 근원을 둔 시인 혹은 시론가로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성탄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국 출생 영국 시인인 엘리엇(Thomas S. Eliot, 1888~1965)의 <황무지>를 스승과 함께 번역했다고 한다. 시인은 <20세기 영시선> 등을 한국어로 번역해 현대 영미시와 시론을 국내에 소개했고, 김춘수의 시와 한시(漢詩)를 영어로 번역하며 한국의 시를 영미권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시 창작에 엄격한 기준을 가진 김종길 시인은 일 년에 두세 편을 쓸 정도로 과작(寡作)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