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사랑을 배웁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나의 문학적, 장르적 취향은 로맨스였다.
낭만 가득한 사랑을 꿈꿔본 것도
동경했던 것도 시작은 있었다.
다만 사랑은 그저 환상 혹은 장면에 그칠 수 없는,
태도로 기술로 다루어져야 하는 인생에 걸쳐 계발해야 할 능력임을 깨달은 건 긴긴 이별의 끝에서야 받아들였다.
글로 사랑을 배웠다는 표현이 쓰인다.
물론 사랑을 하고, 받는 것만큼 사랑을 배우는 확실한 건 없는 것 같다가도
글로도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너가 날 사랑하긴 했니?'
짧은 시간 남이었던 누군가와 깊은 마음을 나누었어도, 함께하는 미래를 그렸어도
사랑을 묻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나는 내 지난 사랑을
후회했고 '사랑'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시남녀의 사랑법에서
한여름밤의 꿈처럼 돌연 사라졌던 은오를 보며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던 나의 모습에
들키고 싶지 않았던 초라함을, 외면할 수 밖에 없던 그녀의 심정을 나는 차마 탓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로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고. 이 말이 내게 오고서야 헤어진 그의 심정을 헤아렸다. 그가 되어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을만큼.
내가 배운 사랑의 모습들은
그가 내게 보여준 사랑으로, 이별 후 곱씹었던 마음들로, 글로 배우는 사랑으로 채워가고 있다.
'앞으로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 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의 문장은 때로 어려워서 밀도 있게 끝까지 읽지 못하지만, 그의 문장 몇 개가 마음 속에 늘 함께 한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사랑은 결여나 결핍, 슬픔과 제일 잘 어울리는 단어임을 알았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으로.
비록 슬픔을 이기지 못한 지난 사랑에,
함께하는 슬픔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당신이, 우리가 하는 사랑이 꼭 이런 사랑이라면 좋겠다.
그래서 한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할 결심은 노력으로,
슬픔마저 함께할 사랑의 결심으로 임할 수 있게.
나는 모모에게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심지어는 이 모든 시작이 사랑이었다고, 더 구체적으로 '비라하'.
헤어지고 나서야 이해하게 된 사랑이었다고.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구원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주체가 될 때만이 사랑은 구원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