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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이혼녀 1

쌀집 아저씨

by 안개바다

동사무소 뒷골목 허름한 쌀집을 지난다.

쌀, 보리쌀, 콩, 팥 온갖 잡곡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해가 지면 쌀집 주인과 옆집 연쇄점 주인은 늘 술을 마셨다.

"화가 선생 와서 술 한잔하고 가"

쌀집 아저씨가 큰소리로 불렀다.

몇 번 쌀을 산 적이 있는데 쌀살 돈 없으면 그냥 가져다 먹으라는 인심 후한 사람이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면 빌어먹고 사는 줄 아나 보다.


쌀집 구석 낡은 책상에 소주 두 병과 두부 한 모 그리고 갓김치가 놓여있다.

"요즘 어떻게 그림은 잘 팔리나?"

낡은 철제 의자를 끌어다 앉히며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주고 안부를 물었다.

"화가 선생 내가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 결혼해서 빨리 애 낳아, 애인 없나? 없으면 내가 소개해 줄까? 조흥은행 다니는 아가씬데 똑똑하고 예쁘고 아주 착해,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취했는지 발음이 꼬였다.

"아이구 형님 수연이 말하는거쥬. 아가씨는 무슨 작년에 이혼했구먼."

연세점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야 인마! 일주일 살고 이혼했는데 아가씨지 뭐."

쌀집 아저씨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니 형님은 왜 거시기 멀쩡한 총각한테 이혼녀를 떠넘기려고 해유, 결혼식을 했고 혼인 신고를 했으면 이혼녀지 경우가 그렀찮어유 일주일만 살고 헤어진 게 뭔 상관이유."

연쇄점 주인은 자율방범대원이며 원리원칙을 따지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런 니기미 야! 화가 자네 생각은 어때 일주일 살고 이혼했는데 아가씨야 이혼녀야 말해봐."
화가 선생에서 그냥 화가로 좌천됐다.
조금 있으면 환쟁이로 전락할 것이다.
"하루 살고 헤어져도 호적상으로는 이혼이니까 연쇄점 아저씨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쌀집 아저씨는 안주도 없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셨다.


수연의 아버지와 쌀집 아저씨는 고향 친구로
오 년 전 그녀의 아버지가 암으로 죽고 나서부터는 쌀집 부부가 친딸처럼 보살폈다고 한다. 쌀집 아저씨의 소개로 허우대 멀쩡한 청년과 결혼을 했는데 사기 전과가 두 자릿수에 이혼남이었다. 그간의 사정을 들어보면 아저씨도 파투 난 결혼의 죄책감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밤이 깊도록 사기꾼 놈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야 화가야 나 초상화 하나만 그려줘라. 화병으로 오래 못 살 것 같다."

본격적인 쌀집 아저씨의 술주정이 시작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짐 자전거에 쌀 한 가마니는 싣고 다녔는데 요즘엔 쌀 한 말 드는 것도 벅차다고 했다. 모든 것에 의미를 잃었다고 한다.
햅쌀도 의미 없고 녹두 콩도 의미 없고 하루 살았다는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지만
의사가 하지 말라는 술과 담배는 꾸준히 의미를 부여하며 먹고 있었다.

"근디 형님 이 화가 선생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개해줘도 되는 건가 모르것네,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리고 사기꾼일지 누가 알어유."

또 조흥은행 이혼녀를 안줏감으로 올렸다.

"내가 이 친구 일 년을 지켜봤는데 가난해서 그렇지 나쁜 놈 같진 않아 그렇지 화가야."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내가 쌀집 아저씨 눈에 띄기라도 하면 쌀집에 앉혀 놓고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내 신상에 대해서, 민감한 사생활까지 알고 싶어 했었다.

두 아저씨는 나를 조흥은행 이혼녀의 신랑감으로 정해놓고 옥신각신 저울질을 했다.


"좋습니다. 제가 어떤 여자 하고도 결혼은 안 하겠지만 누나처럼 친구처럼 지낼 테니 소개해 주십시오."

취했는지 내 입에서도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떤 여자 하고도 결혼을 안 혀? 너 고자여?"

연쇄점 아저씨는 만취해 있었다.

"내가 자네 얘기해 놓은 게 있어서 전화해도 실례가 되진 않을 거야 내일 꼭 연락해 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쌀집 아저씨가 수첩을 뒤적이더니 신문지를 찢었다. 대통령 얼굴에 이혼녀의 이름과 조흥은행 담당 부서 전화번호 삐삐번호까지 유성매직으로 적어주었다.

하여튼 알아서 하라는 협박과 함께.


자정이 다 되어서야 쌀집에서 풀려났다.

술 먹고 올라가는 옥탑 화실 녹슨 철 계단, 흔들리는 난간 밑을 내려다보면서 떨어지면 죽을까 살까 호기심이 생겼는데 제일 기분 좋은 날 실험을 해봐야겠다.


다음날 오전 10시 정각 대통령 얼굴에 적혀있는 삐삐 사서함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저는 옥탑 화실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김수연 씨가 여자라는 것과 이혼녀라는 것,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희귀한 생물체를 만나고 싶으면 연락 주세요.

지금부터 12시까지만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5분 전 12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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