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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드라이브

나의 로망 자주색 르망 자동차

by 안개바다

정말 가을이 온 것일까,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의 넓은 손바닥도 조금씩 수분을 잃어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하늘엔 고추잠자리, 팔을 높이 뻗어 손가락을 세우고 눈을 감는다. 잠시 손가락 끝에 앉아 날개를 숙인다. 그러다가 '외로우신가요?' 쓸데없는 질문만 하고는 투명한 날개를 떨며 날아가 버렸다.

오늘도 기별 없는 이름 하나 바람 속을 떠다니는데.


열등감

소나기 내리던 한여름밤 길가에 주차된 자주색 르망을 보며, 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춘천으로 여행 가고 싶다던 그대의 말씀.
쪽팔려서 못 들은 척했지만 그때 그 시간 자주색 르망은 전두엽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 한 번이라도 그럴듯한 데이트를 하려면 중고차라도 사야겠다.

자동차 매매센터에서 보고 온 자주색 르망을 사기 위해서 며칠 밤을 새우며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는 미술 공모전이 많은 가을, 출품작을 대신 그려주고 대가를 받는 비윤리적인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술로 돈 벌 수 있는 일은 다했지만 자동차 문짝도 살수없는, 턱도 없는 금액만 모았다.

빠른 길을 찾아야 했다.

낮에는 일층에 세 들어 있는 노가다 형님을 따라다니고 밤에는 학사주점'뜨락'에서 동동주에 파전을 날랐다.

지쳐서 새벽에 화실로 돌아올 때면 옥상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과 맨드라미는 깊은 잠에 빠져 꽃잎을 접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 꼬락서니를 못 본 체 잠들어 있는 꽃들이 고마웠다.

거리엔 건조한 낙엽이 쌓이고 잔고 만오천 원이었던 내 통장에는 기름진 돈이 쌓였다.

어느새 옥상 화단의 꽃들은 나의 무관심 속에서 모두 죽어있었다.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도 앙상한 대궁으로 남아 바람 속에서 휘파람만 불었다.

나의 가을은 시한줄 읽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시들어 버렸다.

계획대로 겉만 번쩍거리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중고차 르망을 샀다.


레스토랑 릴케

그녀와 도심에서 한 시간 떨어진 북한강가의 이층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저녁을 먹었다.

"우리 두 달 만에 보는 거지? 너 춘천여행 가고 싶대서 차 샀어 자주색 르망이야."
어색한 분위기에서 농담이랍시고 내가 말했다.

"응! 차 이쁘네."
그녀가 무심히 말하며 어두워진 창밖을 본다.

겨울 강은 달을 띄운 채 을씨년스럽게 흘러간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어찌 시린 달뿐이랴,

길었던 우리의 시간도, 별만큼이나 많았던 사랑의 고백도 함께 떠내려간다.

반짝 그녀의 눈물이 보인다. 못 본 척했다.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한 늙은 웨이터가 눈치를 보다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과한 친절이 부담스럽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말이 없었다.

아무리 세게 틀어도 따듯하지 않은 히터소리와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때 이른 크리스마스 캐럴 '울면 안 돼'가 답답한 분위기를 더 숨 막히게 했다.

서로가 아무 말이라도 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끝내 침묵하고 말았다.


담쟁이넝쿨 말라비틀어진 그녀 집 대문 앞.

"잘 살아."
그녀가 눈은 울고 입은 웃으며 말한다.

"너도."
식도염 환자처럼 명치끝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짧게 인사를 했다.

화실로 오는 길, 참았던 설움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앞차의 후미등이 흐려지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정오까지 첫눈 치고는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 질퍽거리는 눈길을 달려와 양심까지 난도질하며 샀던 르망을 반값에 팔았다.

그녀를 만나야 할 명분과 새벽에 전화해서 보고 싶다 말했던 뻔뻔한 고백은 르망 트렁크에 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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