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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Nov 20. 2022

춘천옥 아줌마

분 냄새


"이 인간이 또 어디서 술 퍼마시고 있나 보다, 요 앞에 점방에 없으면 춘천옥에 가보거라 으이구 지겨워"

엄마는 술 마시러 나간 아버지 동선을 꿰고 있었다. 광산에 하나밖에 없는 무령 극장의 간판 불도 꺼진 지 오래, 다행히 달빛이 밝아 넘어지지 않고 시장 끝 춘천옥에 도착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분명히 아버지의 '유정천리' 노랫소리다.

밥상과 주전자를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네댓 명의 아저씨들이 반은 취하고 반은 졸면서 춘천옥 아줌마를 중심으로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아부지 엄마가 아부지 데려오래요."

아버지가  옆에 끌어다 앉히며 구운 양미리 하나를

집어 주었다.

"얘가 우리 집 장손인데 공부도 잘하고 장래희망이  대통령이라네."

술친구들에게 자식 자랑을 늘어놓았다.

무령 국민학교 한 반에 오, 육십 명인데 남자애들 대부분 장래희망이 대통령, 군인, 경찰이었다.

장손인 것도 사실이고 장래희망이 대통령인 것도 맞지만 공부 잘한다는 것은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늘도 공부 못해서 손바닥 다섯 대나 맞았다. 산수 시간에 구구단 8×7=54라고 해서 세대 맞았고, 국어시간 받아쓰기, 닭이 지렁이를 밟았다를 '다기 지렁이를 발바따'로 정직하게 써서 두 대 맞았다. 매일 맞다 보니 한 학기가 끝나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였다.


"어! 너 어제 개 쫓아준 애 맞지?"

어제 하굣길에 똥개에게 물릴 뻔한 춘천옥 아줌마를 구해줬었다.

무령 광업소 똥개 중에서 내 짱돌에 맞지 않은 똥개는 없을 것이다. 낯익은 똥개들도 여름 초복이 지나며 차츰 사라졌고 말복이 지나면 다시 강아지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제요 얘 과자 좀 사주고 올게요."

춘천옥 아줌마가 손을 잡았다.

엄마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향긋한 분 냄새와 보드라운 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어제 개 쫓아줘서 고맙다. 난개가 제일 무서워."

볼에 뽀뽀를 해주었는데 입에서 막걸리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지만 분 냄새를 이기진 못했다. 가까이 본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였다.

뽀빠이와, 박하사탕을 사줘서 예뻐 보이는 건 절대 아니다.


가을날 옥색으로 물들인 한복에 반짝이는 큐빅이 알알이 박혀있는 핸드백을 들고, 코스모스 길을 걸어갈 때면 마주치는 아저씨들이 가볍게 묵례를 하고 몇 걸음 못 가서 뒤돌아봤다.

술집 여자인데도 거친 광부들은 항상 예의를 갖추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예뻐서 그랬나 보다.

그래서인지 춘천옥 아줌마는 사택 못생긴 아줌마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막장에서 번 돈이 저년의 치마 속으로 다 들어간다거나,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술집 작부라는 소리를 들으며 머리채를 잡고 싸울 때도 기가 죽지 않았다.

"니 남편 간수나 잘해 이년들아 니들이 얼마나 못났으면 내 치마폭에서 놀겠냐."

용감하게도 사택 아줌마들 전체를 상대로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달빛 아래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아버지가 신작로 넓은 길에서 비틀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어제 내 짱돌에 맞았던 영식이네 메리가 컹컹거리며 짖었다.


자꾸만 분 냄새 생각이 났다.

멀리서 춘천옥 아줌마가 보이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내 손에는 매끄러운 짱돌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아줌마가 제일 무서워하는 똥개가 나타나면 만화에서 봤던 손오공처럼, 악당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줌마를 구해주면 또 분 냄새나는 뽀뽀를 해줄지 모를 일이다.

춘천옥 아줌마가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다가 똥개 한 마리 나타나지 않은 섭섭함에, 옥수수밭으로 신경질 부리며 짱돌을 힘껏 던져버렸다.

'툭' 여린 옥수수 대궁 하나가 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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