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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독수리

by 안개바다

안식처를 찾지 못한 유령처럼 새벽마다 골목길을 떠돌았다. 습관이 돼버린 불면의 새벽 외출.


언제나 바람뿐인 골목길엔 어느새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 황색으로 점멸하는 사거리 신호등 아래 쓰레기 더미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보인다.

대충 묶어놓은 까만 비닐 봉다리를 주워 들었다.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노란색 병아리 두 마리.

한 마리는 이미 죽어 있다. 누가 버렸는지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쓰벌, 벼락을 쫓아다니며 맞아야 될 인간들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쪼그리고 앉아 잠시 망설였다

무슨 이유로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내 눈에 띄었을까.

이 작은 생명체가 억겁의 시간을 지나서 나와 연(緣)이 닿았다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생명의 경중을 따진다면 내 목숨이 병아리보다 중한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죽은 병아리는 성문교회 화단에 묻어주고 남은 한 마리는 성심을 다해 키워보기로 했다.

생쌀을 갈아서 물과 함께 넣어주었다.

새벽인데도 라면박스 안에서 쉬지 않고 모이를 먹는 병아리. 닭들은 밤에도 전등만 켜놓으면 잠을 안 자고 계속 먹는다는데 어떻게 쉬지 않고 먹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먹이를 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박스를 쪼던가 악을 쓰며 삐약 거린다.

날이 밝자마자 닭장을 만들었다.

노란 털 뭉치가 커질 것을 생각해서 공작새도 살 만큼 크게 만들었다.

닭장을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 옆에 놓았다.

너무 크게 만들었는지 병아리가 더 작아 보인다.


유기된 목숨들

자려고 침낭에 들어가 눈을 감는다.

옥상 난간에 앉아 병아리를 노려보던 얼룩 고양이의 서늘한 눈빛이 생각나 잠을 잘 수가 없다. 닭장을 튼튼하게 만들었으니까 괜찮겠지.

'야옹'

길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 옥상 화실까지 올라와 어슬렁거리던 건달 고양이에게 몇 번 분홍소시지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 건달 녀석이 분명했다.

젠장 불안하다.

넓은 닭장 구석에 옹크리고 있는 노란 털 뭉치, 닭장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울까, 병아리 입장에서는 내가 세상에 갇힌 건지도 모르겠다. 닭장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나의 불안은 그대로다.
라면 박스에 담아서 데리고 들어왔다.
밝아서 그런지 또 모이를 먹으며 삐약 거린다.
불을 껐다.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바람이 불고 커튼이 펄럭거렸지만 내 옆에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 밤은 외롭지 않았다. 별밤 이문세가 엔딩곡으로 들려주는
el condor pasa를 들으며 나른한 행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병아리 녀석에게 위로를 받다니...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안데스의 높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의 꿈을. 태양을 가리며 비행할 땐 초원의 유목민이 머리를 조아렸고 토끼를 쫓던 여우도 굴속으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었지만 금빛으로 반짝이는 날갯짓은 멈추질 않았다.

꿈을 깼을 땐 새벽 두 시.

이젤 앞에 앉았다.
형광등의 밝은 불빛에도 웬일인지 병아리의 움직임이 없다. 손바닥에 올려보았지만 모가지를 늘어뜨린 채 눈을 뜨지 않았다.

문득 끓는 기름에 닭강정이 되는 것보다는 짧았던 인연이 다행이라는 부질없는 생각.

또다시 바람의 골목길.

나는 추락한 독수리를 잠바 주머니에 넣고 왼 손에는 꽃삽, 오른쪽 손에는 소주병을 든 채로 사르비아 피어있는 성문교회 화단으로 흔들리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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