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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집 첫째 딸의 사생활

by 안개바다

콘크리트 전봇대에 달라붙은 참매미가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열사병에 걸린 옥상화실,

온도계의 수은주는 아침부터 삼십 도를 넘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폭염 주의보를 발령했고, 일층에 세 들어 있는 노가다 박 씨 형님은 덥다는 핑계로 며칠씩 일을 나가지 않아 부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사 오면서 만들었던 옥상의 작은 화단에서는 나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이 넓은 손바닥을 늘어뜨린 채, 주근깨 까만 얼굴로 빈하늘만 응시하고 있다. '소피아 로렌' 그림자마저 짧아지는 정오의 열기에도 일편단심 태양만 바라보는 것이 기특해서 지어준 이름이다.

소피아 로렌 발밑에 피어있는 사르비아와 채송화의 이름은 가을이 오기 전에 꼭 지어 주어야겠다.


악연

불면의 새벽 2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새벽 외출을 한다. 골목 끝에서 휘적거리는 익숙한 실루엣, 주인집 첫째 딸이 거나하게 취해서 퇴근을 한다.


이사 오던 날부터 주인 행세하는 첫째 딸과 욕지거리를 하며 싸운 것을 시작으로, 내가 키우던 바퀴벌레를 때려죽인 만행까지, 주인집 첫째 딸과 나는 전생에 톰과 제리였을 것이다. 누가 고양인지 쥐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는 첫째 딸이 고양이 인건 확실하다. 멀리서 저 여자가 보이기라도 하면 내가 피해야 하니까.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위, 티켓다방 포주, 사람들은 김 마담이라 부른다. 안 싸운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싸운 사람은 없다는 이 골목 공공의 적.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모른척해 주길 기대하면서...

"야 옥상!"

젠장 들켰다.

"한집에 살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쥐뿔도 없는 새끼가 그림만 그리면 다야?"

'쥐뿔도 없는 새끼'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안녕하십니까 이제 퇴근하세요?"

심드렁하게 인사를 했다.

"그래 새벽에 퇴근한다. 씨발 뭘 봐 새꺄 너도 만져보고 싶냐? 용기도 없는 새끼가."

더워서인지 명치까지 단추를 풀어버린 블라우스 안에서 하얀 젖가슴이 민망하게 흔들렸다.

"용기 없는 게 아니라 만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제가 면역력이 약해서 손때 묻은 물건을 만지면 두드러기가 나거든요."

홧김에 말해놓고 도망갈까 잠시 갈등했다.

"뭐라구 이 새끼가 장난하냐?"

김 마담이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땀에 절은 값싼 술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감마담의 술주정에 열대야로 뒤척이며 선잠 자던 골목이 깨어나고 있었다.

체면을 가장 큰 덕목으로 아는 주인집 아저씨가 달려 나와 동네 창피하다며 김 마담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연행되면서도 협박을 한다.

"씨발 누구든지 뒷구멍에서 내 얘기하는 것들은 다 뒈질 줄 알아."


그대에게 띄우는 위로의 엽서 한 장

옥상으로 올라가는 이층 철 계단 옆, 열어놓은 창가에서 김 마담의 넋두리를 듣는다.

이혼한 남편과 양육권 소송을 하려는데, 잘 나가는 변호사 수임료가 꽤나 비싼 가보다.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아이들과 살기 위해서는 개같이 벌어도 모자랄 판이라, 같잖은 동포들의 손가락질과 돌팔매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가끔 보는 아이들이 점점 엄마를 낯설어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울면서 아이들 욕을 하다가 헛구역질을 한다. 뚱뚱한 주인집 아줌마가 어린 딸들이 보고 싶다고 떼쓰는 나이 먹은 딸을 다독이며 같이 울고 있다.


까치발로 철계단을 올라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12절까지 인쇄된 성문교회 주보로 종이비행기를 정성스레 접었다. 옥상에서도 제일 높은 화실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지금도 울고 있을 이층의 김 마담 창가로 무사히 착륙하길 바라며 종이비행기를 힘껏 날렸다. 처음으로 저 여자의 편이 되어주고 싶다는 의미 없는 마음을 담아서.


온몸이 땀에 젖어 악몽에서 깼다. 악몽은 현실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골목길의 응급차가 필요이상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존재를 알린다.

김 마담이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손목을 그었다고 한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응급차 백미러에서 핏빛 태양이 뜨겁게 반사되고 있었다.


병원으로 실려간 김 마담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 새벽 내가 보낸 위로의 엽서를 읽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새벽의 가을공원

갈색의 서러움, 가을이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도 슬픈 절망의 계절, 가슴속에서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이름도 詩가 되는 가을밤, 나는 또 견디지 못하고 새벽 골목길을 걷는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별 하나 없다.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어이 옥상!"

새벽에 퇴근하는 김 마담이다.

"안녕하세요."

술을 마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 독기가 없다.

"오늘도 새벽에 만나네, 우리 요 앞 공원에서 술 한잔할까?"

손에는 소주 두 병이 들려있다.

새벽의 가을공원에는 계절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벤치에 쌓인 은행잎을 치우고 앉아 술잔도, 안주도 없는 술을 마신다.

"그림은 잘 돼가?"

김 마담이 왼쪽 손목에 손수건을 고쳐 묶으며 묻는다.

"뭐 그럭저럭... 여자 장사는 잘 되시나요?"

소주병 주둥이에서 입을 떼고 나도 안부를 물었다.

"씨발 말을 해도 여자 장사가 뭐냐."

김 마담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피식 웃었다.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아가씨들 선불 땡겨서 도망가지,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에 벌금 내지, 양아치들 세금에... 엄마가 돼서 애들 보기도 부끄럽고."

담뱃불이 사르비아처럼 빨갛게 피어난다.

"지난번 자살에 실패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실패를 축하하다니... 고마워 축하해 줘서."

담배연기와 한숨 한 모금을 길게 뱉어낸다.


텅 빈 공원에 습기 찬 바람이 불었다. 검은 비닐봉지가 박쥐처럼 날아다닌다. 더러는 유기견에게 쫓기는 길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에, 은행나무 하나가 몸서리치며 마지막 잎을 털어낸다. 공원의 외등 불빛 속으로 비가 내린다.

화실을 나올 때부터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우산 안 가져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술병의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새벽에 내리는 가을비를 앉아서 맞았다.

그러고선 흔들리는 골목길을 말없이 걷다가 젖은 눈이 마주치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그녀와 나의 야윈 어깨 위로 결핍과 열등감이 번갈아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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