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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ug 07. 2022

조흥은행 이혼녀. 1

쌀집 아저씨

인사동 전시회에 갔다 오는 늦은 저녁.

동사무소 뒤쪽에 자리한 전봇대 외등 밑 허름한 쌀집을 지난다.

쌀, 보리쌀, 콩, 팥 온갖 잡곡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해가 지면 항상 쌀집 주인과 옆집 연쇄점 주인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가 선생 와서 술 한 잔 하고 가."

쌀집 아저씨가 큰소리로 불렀다.

몇 번 쌀을 산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이 동네에서 쌀을 제일 조금 먹는다며, 쌀 살 돈 없으면 그냥 가져다 먹으라는 인심 후한 사람이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면 빌어먹고 사는 줄 아나 보다.

쌀집이 복덕방 구실도 하고 있어서 동네 돌아가는 사정도 훤이 알고 있었다.

어느 집에 월세방이 나왔고 어느 집에 쌀이 떨어질 때가 된 것도 알았다.

때가 되어도 쌀을 사러 오지 않으면 직접 방문을 했다. 다른 쌀집에서 쌀을 사 먹는 것은 상관없으나 혹시 굶고 살까 봐 살피는 것이다.

행여 돈이 없어 쌀을 못 사는 집엔 몰래 문 앞에 쌀 한 되를 갖다 놓곤 했다.


쌀집 구석 낡은 책상에는 비워진 소주병 두 개와 안주로 두부 한 모와 김치가 놓여있었다.

"요즘 어떻게 그림은 잘 팔리나?"

낡은 철제 의자를 끓어다 앉히며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주고 안부를 물었다.

"화가 선생 내가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 결혼해서 빨리 애 낳아, 그래야 안정이 지 애인 없나? 없으면 내가 소개해 줄까? 조흥은행 다니는 아가씬데 아주 착해."

취했는지 발음이 꼬이고 있었다.

"아이구 형님, 아가씨는 무슨 작년에 이혼했구먼."

연세점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야! 한 달 살고 이혼했는데 아가씨지 뭐."

결혼을 하고 보니 사기 전과가 내 나이만큼있었 애가 둘 딸린 이혼남이었다고 한다. 퇴직금이며 적금까지  몽땅 사기를 당한 모양이다.

사기꾼소개도 쌀집 아줌마가 고, 그 결혼의 주례를 쌀집 아저씨가 봐줬다고 하니 아저씨도 파투 난 결혼의 죄책감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아니 형님은 왜 멀쩡한 총각한테 떠넘기려고 해유. 결혼식을 했고 혼인 신고를 했으면 이혼녀지 경우가 그렀찮유 한 달만 산 게 무슨 상관이유."

연쇄점 주인은 자율방범대원이며 맨손으로 칼을 든 강도를 때려잡아, 경찰서에서 표창장까지 받은 사람이었고, 원리원칙을 따지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 이런 니기미. 야! 화가 자네 생각은 어때 아가씨야 이혼녀야?"

쌀집 아저씨가 언성을 높였다.

화가 선생에서 그냥 화가로 좌천됐다.

조금 있으면 환쟁이로 전락할 것이다.

"제 생각엔 요즘 몇 년씩 동거하다 헤어지는 사람도 많으니, 한 달 살고 끝난 게 흠될 것 없지만 호적상으로는 이혼녀니까  연쇄점 아저씨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께 형님 그만 우겨유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유 우리말이 틀린 지."

연쇄점 아저씨가 거들었다.

소주 한 잔 얻어마시고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 둘 사이에 끼어서 진땀을 뺐다.

"내가 동네 망신스러워서 그런다. 어이구 속 터져

그런 놈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봤으니 어떻게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냐."

쌀집 아저씨가 한풀 죽어서 체면 깎인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연쇄점 아저씨가 소주 두 병과 새우깡을 들고 왔다.

자정이 넘도록 사기꾼 놈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야 화가야 나 초상화 하나만 그려줘라. 오래 못 살 것 같다."

본격적인 쌀집 아저씨의 술주정이 시작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짐 자전거에 쌀  가마니는 싣고 다녔는데 요즘엔 쌀 한  드는 것도 벅차다고 했다. 병원에 가니까 당뇨에 고혈압이라고 했단다.

쌀집 아저씨는 모든 것에 의미를 잃었다고 한다.

햅쌀도 의미 없고. 녹두 콩도 의미 없고, 하루 살았다는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지만 

의사가 말리는 술과 담배는 꾸준히 의미를 두고 먹고 있었다.

"걔 아버지 하고는 고향 친군데 지 마누라도 교통사고로 죽고, 그놈도 암으로 죽을 때 내가 잘 보살핀다고 약속을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어. 내가 죽어도 그 아이 불쌍해서 눈을 못 감겠다."

또 조흥은행 이혼녀를 안줏감으로 올렸다.


십 년 전에 홀아비 친구가 죽고 나서부터 친딸처럼 보살폈고, 그녀도 아버지 대하듯 대소사를 의논하며 결혼은 쌀집 아저씨가 소개해 주는 남자하고 하겠다,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얘기를 들어보면 쌀집 아저씨의 입장도 이해가 갔으며, 조흥은행 이혼녀의 팔자도 그리 평범하지는 않았다.

"근디 형님 이 화가 선생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개해 주면 어떻해유. 나이도 두 살 어리고 사기꾼일지도 모르는디."

연쇄점 아저씨도 거의 만취 상태였다.

"눈빛을 보면 알지, 내가 이 친구 일 년을 지켜봤다. 내가 그 애한테도 이 친구 얘길 해놓았어.

가난해서 그렇지 나쁜 놈 같진 않아 그렇지 화가야."

두 아저씨는 나를 조흥은행 이혼녀의 신랑감으로 정해놓고 옥신각신 저울질을 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내가 쌀집 아저씨 눈에 띄기라도 하면, 쌀집에 앉혀 놓고 장면을 사주며 내 신상을 알고 싶어 했으며 집안 내력을 물어본다든지, 심지어는 햅쌀인데 먹어보라고 화실로 가져온 적도 있었다.

"좋습니다. 제가 어떤 여자 하고도 결혼은 안 하겠지만 누나처럼 친구처럼 지낼 테니 소개해 주십시오."

기분 좋게 취하자 내 입에서도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떤 여자 하고도 결혼을 안 해? 너 고자여?"

이제 연쇄점 아저씨까지 놀리고 있었다.

"내가 자네 얘기해 놓은 게 있어서 전화해도 실례가 되진 않을 테니 내일 꼭 연락해 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쌀집 아저씨가 수첩을 뒤적이더니 신문을 찢어 메모해 주었다. 

대통령 얼굴에 이혼녀의 이름과 담당 부서 전화번호 삐삐 번호까지 써주었다.  

얘 갖고 장난치면 죽는다는 협박과, 결혼 안 해도 좋으니 항상 웃게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술 먹고 올라가는 옥탑 화실 녹슨 계단, 흔들리는 난간, 밑을 내려다보면서 떨어지면 죽을까 살까 호기심이 생겼는데 제일 기분 좋은 날 실험을 해봐야겠다.

옥상 화분에 심어놓은 해바라기 소피아로렌

달빛에 꽃잎을 접고 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10시 정각에 대통령 얼굴에 적혀있는 삐삐

사서함에 음성을 남겼다.

"저는 옥탑 화실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쪽이 여자라는 것과 이혼녀라는 것,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희귀한 생물체를 만나고 싶으면 연락 주세요.

지금부터 딱 12시 55분까지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정확히 12시 50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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