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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바다 Dec 10. 2024

고립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화실 문틈에 끼어있는 메모 한 장. 잠시 망설이다 읽지도 않은 채  연탄난로에 집어넣었다.


가을에 만들었던 평상에 누워 눈을 감는다.

겨울밤의 냉기가 온몸의 실핏줄들을 하나하나 마비시켰다. 염병할 옥상의 겨울,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면 포근할 텐데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봐도 은하수 맑은 하늘, 겨울바람에 해바라기 빈 대궁만 휘파람을 불고 있다.


불면의 밤이면 그대가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베이지색 잠바를 입고  외출을 한다.

어깨를 최대한 접고 시선은 바닥에 둔 채로 외등 하나 없는 골목길을 유기견처럼 기웃거렸다.

소변 금지와 시뻘건 가위가 그려진  담벼락에 오줌을 쌀 때면 내가 정말 개 같다는 생각에 한쪽 다리를 들고 눈썹달을 보며 하울링도 했다.


담쟁이덩굴처럼 이어지는 골목길.

바람이 지나고 바람이 죽어서 쌓이는 바람의 무덤까지 당도하고 말았다. 그 길목 끝에 자리한 빨간 십자가의 성문 교회, 미스 민이 살고 있는 목련 여인숙, 외상 술 잘 주는 영월 식당,  쌀 집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숨넘어가는 웃음소리, 너무도 정겨워서 울컥 눈물이 났다.

나는 끝내 황색 신호등이 점멸하는 새벽까지 겨울의 골목길에 중독되어 있었다.



겨울잠


화실 문 걸어 잠그고, 주제넘게 그려왔던 그림들 모아 난로의 땔감으로 쓰면서 진달래 피는 봄이 올 때까지 술이나 마셔야겠다.

행여 그대가 문을 두드릴 때에는 아무도 없는 척 숨죽이고 있다가, 문틈에 메모 한 줄 남기고 돌아서는 그대의 야윈 뒷모습 조금만 훔쳐봐야지.

그러다 서러워 울고 싶어지면 바람 부는 골목길을 유기견처럼 쏘다니면 될 일이다.


오늘도 성애 낀 유리창에 써보는 가슴 시린 고백.


                                   미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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