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다.
'반공 방첩, 무찌르자 공산당' 시뻘건 표어가 붙어있는 사택 벽에 기대어 상호 형이 하모니카를 불었다.
상호형은 읍내 고등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다가 토요일과 방학 때만 집으로 왔다. 엘리트 교복과 까만 모자에 달린 금빛의 한자'高'가 꽤나 멋져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 담배를 피우다 들켜서 무기정학도 맞았었다. 동네에서 상호형은 싹수가 노랗다거나 발랑 까진 놈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엄마도 상호 놈 근처엔 가지도 말라며 혀를 찼다.
하모니카 소리가 좋아서 형 앞에 턱을 괴고 한참을 쳐다봤다. 입으로 부는 작은 풍금 같았다.
"야! 너 담배 하나만 사와라. 남는 건 쫀드기
사 먹어 내가 담배 사면 소문날까 봐 그런다."
상호형이 은밀히 꼬드겼다.
"형! 나 하모니카 가르쳐 주면 쫀드기 안 사줘도 방학 동안 심부름할게."
흔쾌히 승낙했고 거래가 성사되었다.
애국가
무령산으로 올라갔다.
한여름이지만 해발 800m에 위치한 광산은 산에만 올라와도 서늘했다.
내려다보이는 까만 신작로엔 동발을 실은 제무시 한 대가 빌빌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아이들 몇 명이 제무시 뒤꽁무니에 매달려 뿜어져 나오는 매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장수하늘소가 살고 있는 상수리나무그늘 아래서 상호형의 개인 교습이 시작됐다.
"야! 하모니카 별거 없다. 음계 몰라도 애국가만 배우면 모든 동요는 다 연주할 수 있어, 요기서 불고 여기서 마시고 해 봐."
애국가만 집중적으로 알려줬다.
형이 불던 하모니카에서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꾹 참고 배웠다.
신기하게도 애국가를 일주일 동안 연습한 결과 학교 종을 연주할 수 있었고 보름이 지나서는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까지 모든 동요를 연주할 수 있었다.
곤충채집이나 땅따먹기도 하지 않은 채 나의 여름방학은 하모니카와 함께 끝이 났다.
물론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상호 형의 담배 심부름을 꾸준히 했다. 상호형이 읍내로 가던 날 하모니카를 선물로 주고 갔다.
미희와 나란히
난 계명을 몰라도 하모니카를 연주할 수 있다.
부반장 미희에게 하모니카로 모든 동요는 다 연주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정말이야 내가 들어봤어."
영식이도 옆에서 맞장구치며 추켜세웠다.
"지랄하네 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연주를 하냐 저리 가 꼴찌들하곤 안 놀아."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미희의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세게 잡아당겼다. 미희가 울면서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바람에 손바닥 두 대를 맞았다.
음악 시간이다.
"너 정말 음악책 안 보고 연주할 수 있어? 거짓말이면 손바닥 다섯 대야."
선생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오라고 했다.
교단에 섰다. 손바닥이나 엉덩이 맞을 때만 불려 나왔는데 오늘은 60명 앞에서 연주하려고 나왔다. 섬집 아이를 연주했다. 연주하면서 미희를 쳐다보니 놀라는 눈치다.
성공했다.
선생님과 반 아이들 모두가 박수를 쳐주었다.
계명을 모르는 꼴찌라도 하모니카 잘 분다는 것을 미희도 알아야 한다.
"선생님! 미희가 노래하고 제가 옆에서 연주하면 안 돼요? 아무 노래나 상관없어요."
내가 잘난 척을 하자 미희가 눈을 흘겼다.
"그래? 선생님이 풍금으로 화음 넣을 테니까 미희가 나와서 노래해 봐. 너는 미희 옆에서 하모니카 연주하고."
우헤헤, 너무 좋아서 히죽거렸다.
미희가 나오면서 쌍욕을 했다. 아무도 못 들었지만 내 귀엔 들렸다.
"야 저리 좀 떨어져."
미희가 어깨로 저만치 밀어냈다.
"안돼! 선생님이 니 옆에서 연주하랬어, 너 왜 선생님 말씀 안 듣냐."
미희의 귀에다 대고 점잖게 타일렀다.
어이없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선생님의 풍금 소리와 미희의 노래, 나의 하모니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천상의 하모니였다. 미희는 지옥이겠지만... 우헤헤
선생님이 잘했다고 칭찬도 했다.
쉬는 시간마다 미희 옆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다녔다.
"야!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불어."
미희가 신경질을 내더니 빠른 걸음으로 칠판 앞으로 갔다. 떠든 사람으로 내 이름을 칠판 귀퉁이에 적어놓았다.
불쌍한 하모니카
음악 시간에 나의 잘난 척을 도와줬던 하모니카가 더럽게 죽고 말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하모니카를 바지 올리다가 학교 변소에 빠트린 것이다.
어두운 변소를 내려다봤지만 하모니카는 보이지 않고, 빨간 손, 파란 손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하모니카가 불쌍해서 울었다. 톱밥 창고 뒤에서 참매미와 같이 울었다. 영식이가 뽀빠이를 나눠주며 위로를 했다. 지나가던 미희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약을 올렸다.
인정머리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지지배다.
엄마에게 하모니카 사달라고 졸랐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연필 한 자루 살 돈도 없는데 하모니카는 턱도 없었다.
유일한 자랑거리도 없어지고 내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노래하던 미희의 맑은 목소리만 귀에서 또르르 굴러다녔다.
우등생 미희와 항상 꼴찌만 하는 내가 교단에 나란히 서있을 날이 또 있을까?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