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주점 뜨락.
석호형과 술을 마셨다.
석호형은 행사전문 트로트 가수였는데 데뷔하면 록 음악을 할 거라 입버릇처럼 말했고 트로트로 먹고살면서 록 가수라고 우겼다. 아기 공룡 둘리의 마이콜처럼 외출할 때면 언제나 기타가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그림 배우겠다며 처음 화실에 왔을 때도 기타를 가지고 왔으며 국밥집에 갈 때나 영화 보러 갈 때도, 심지어 목련 여인숙 갈 때도 기타는 옆에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꺾어 신은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기타를 데리고 술 마시러 나왔다.
학사주점 사장은 석호형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알고 있는 유일한 팬이었다.
석호형을 보자 술꾼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주점에 머지않아 데뷔할 가수가 왔는데 노래 한 곡 청하겠습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
특이하게도 학사주점 뜨락 홀 중앙에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작은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한 시간 전에는 일본어 전공한다는 여대생이 피아노를 치며 '이츠와 마유미의 고이비토요'를 불렀었다. 싸이키델릭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가진 묘한 여자였다.
칵테일 바에서나 볼법한 높은 의자에서 석호형이 기타 튜닝을 하면서 행사 멘트를 한다.
"사랑의 가객 싱어송라이터 김현식의 '어둠 그 별빛' 불러 보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둠은 당신의 숨소리처럼 가만히 다가와..."
가슴이 시려온다.
"좆같은 세상! 돈과 빽없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나 보다."
석호형이 지난주에 작곡한 악보를 들고 기획사 PD를 만나고 온 날 밤 깡소주를 마시며 한말이다. 모든 것은 돈과 빽에서 시작되고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죽음밖에 없다고 했다.
돈도 빽도, 죽음 앞에선 안통하니까.
시큼한 동동주 냄새에 찌든 학사 주점이 석호형의 뽕끼 묻어나는 발라드에 비틀거렸다.
술잔이 흔들렸고 청춘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록 가수
반쯤 취한 석호형을 데리고 화실로 와서 기획사 PD를 안주 삼아 씹으며 술을 마셨다.
"야 너 이 노래 한번 들어봐라 어제 만든 곡인데 슬로락이고 제목은 억새풀."
'강이 좋아 강이 좋아 강둑에 살지... 저 풀은 나무였는데 강이 좋아 강이 좋아 키다리 풀이되었지......"
석호형이 내 의견을 기다리며 소주를 꼴깍 삼켰다.
"형! 가사는 좋은데 멜로디는 귀에 안 들어와 대중성도 없고 반복되는 음이 지루해 작곡은 다른데 의뢰해 보는 게 어때 아는 작곡가 많잖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뭐라고 새꺄? 이곡이 어때서 자빠져 자 인마."
매번 이런 식이었다. 충고, 조언이라도 하려 하면 네놈이 뭘 아냐는 투로 싸우려 들었다.
이럴 거면 물어보질 말던가, 그렇다고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호형이 말했듯 이곡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데.
화를 내고 먼저 사과하는 쪽은 항상 석호 형이었다. 칭찬을 제외한 모든 말에 상처받는 여리고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상처도 빨리 아물었다. 흉터는 곳곳에 남았을지라도.
석호형이 흔들리는 철계단을 위태롭게 내려갔다.
옥상평상에 누워 꽃잎을 접은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을 올려다본다. 태양만 바라보는 꽃이라니 참으로 낭만적인 꽃이다. 내년에는 옥상화단에 해바라기를 잔뜩 심어야겠다.
그러면 무채색이었던 나의 화실도 오렌지빛으로 밝아지려나.
전화벨 소리에 선잠이 깼다.
석호형이다.
"야! 어제 화내서 미안하다. 폼 나게 살자."
역시 하루도 못 가서 사과를 한다.
석호형의 넋두리처럼 인간의 영역에서 공평한 것이 정말 죽음밖에는 없을까.
나는 옥상의 유배지에서 폼 나게 닭 한 마리를 넣고 개밥을 끓였다.
그리고는 아주공평하게 반으로 나누어 골목길의 절름발이 유기견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개와 食口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