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 다방으로 수민이 왔더라."
음악다방 dj 영준이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심연에 가라앉았던 그녀의 기억이 술잔 위에서 넘쳐흘렀다.
수민은 이 년 전 결혼하고 일본으로 갔었다.
영준이 내 눈치를 보며 말한다.
"너 연락처 물어보길래 모른다고 했어, 동생 결혼식인데 일주일 있을 건가 봐. 전화번호 주고 갔다."
소주를 맥주컵에 부어마셨다.
걱정하는 영준을 뒤로하고 화실까지 걷는다.
가로등마다 수민의 이름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지금도 나를 잊지 않고 있다니 감게 무량해야 하나
수민의 전화번호를 만지작거리며 걷다가 걸음마다 따라오는 찌질한 미련이 쪽팔렸다.
자정이 다되어 가는 시간 작은 책방에서 엽서 한 장을 샀다. 여름이 지나가는 공원에 앉아 우리가 자주 듣던 별밤 이문세에게 엽서를 쓴다. 그대에게 닿길 기대하면서. 신청곡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청승떨기에는 아주 좋은 곡이다
마지막 엽서
나의 늦은 첫사랑 그대.
이제야 기별을 하시다니요.
그대는 어디쯤에 있을까, 은하수 푸른 강에 엽서 한 장 실은 작은 배 띄워 보내던 불면의 밤들. 끝내 그것마저도 바람 불어 침몰할 때에는 내일은 그러지 말자 매일매일 다짐도 했었지요.
어쩌면 나는 그대가 긴 호흡으로 고백했던 소중한 말씀과 그대의 살결에서 나는 사과향기에 중독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도 보고 싶고 내일도 사무치게 보고 싶을 거지만 난 그대를 만나지는 않을 겁니다.
하루에 한 겹씩 쌓아놓았던 그대 향한 결계가 무너져 내리면 우리의 끝은 분명히 파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움과 질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흔하디 흔한 말 부디 행복하세요.
바람의 길목
시내에서 꽤나 먼 거리를 걸었는데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인지 벌써 화실에 도착했다.
이놈의 옥상 철계단은 언제나 위태롭다.
술에 취했는지 녹슨 철계단이 흔들리고 난간이 흔들리고 전두엽과 두 다리도 흔들렸다.
온 세상이 흔들렸지만 옥상 화단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만은 일편단심 흔들리지 않았다.
한 계절을 변함없이 해 뜨는 동쪽에서 꽃잎을 열고 해저무는 서쪽을 보며 꽃잎을 접었다.
병아리 입김 같은 바람에도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만물의 영장이라 우기는 인간이 면목없다.
화실문을 열고 처음 방문한 손님처럼 나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오늘따라 옥탑 화실에 갇혀있는 화구들이 불쌍해 보인다. 붓도 불쌍하고 페인팅나이프, 테레핀, 린시드, 팔레트에 짜놓은 굳어버린 물감, 밑그림만 그리고 처박아둔 캔버스, 석고상 줄리앙까지 눈물겹게 불쌍했다.
니기미, 어두운 화실에 욕 한마디 뱉어주고 골목길을 쏘다녔다.
언제부터인지 바람이 다니는 길을 알게 되었다.
이천쌀집 골목과 영희네미용실 골목은 미친바람이 산발하고 달려드는 곳이다. 미로 같은 원주식당 골목은 바람의 종점이지. 그 종점 끝에는 비루한 청춘들의 성지 목련 여인숙이 있다.
습관처럼 새벽의 골목길을 배회할 때면 유기견이 된 것 같은 착각과 혹시 반가운 누군가를 맞닥뜨릴 거 같은 부질없는 생각. 가끔 반갑지는 않지만 순찰하던 경찰을 만나 검문을 당했다.
'저기 옥상 해바라기 피어있는 곳이 내가 기거하는 곳이요'
손가락으로 친절히 가르쳐 주기도 했다. 검문도 한두 번이지 몇 번을 마주치니까 정말 유기견 보듯 모른 척 지나갔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귀찮은 일도 없어졌다. 무관심하니까 괜히 섭섭해진다.
새벽의 장례식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화실로 돌아오는 길도 잃어버린 채 좀비처럼 걸어 다녔다.
새벽인지 이른 아침인지 모호한 시간에 그녀와 나누어 꼈던 백금 실반지를 어느 낯선 교회 헌금함에 넣어버렸다.
새벽기도하는 교인들 틈에서 나도 맨 끄트머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