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는 지하철 대합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떡진 머리에 목까지 내려온 수염, 남들이 노숙자라 부르든 상관없이 내 눈에는 자유의 냄새가 나는 수행자다.
오늘은 용기를 내서 해장국에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부탁해 봐야겠다.
수행자 옆에 살며시 앉았다. 엉덩이부터 겨울의 냉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나의 존재를 모르는지 한참을 영문으로 된 책에 구멍이라도 낼 듯 활자들만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가 당황한다. 황급히 읽던 책을 배낭에 쑤셔 넣고 달아나 버렸다. 반쯤 열린 배낭에서 종이 쪼가리 한 장과 열쇠 꾸러미가 떨어졌다. 주워서 뒤를 쫓았지만 텅 빈 역 광장에는 아무도 없고 시계탑 위로 비둘기만 날아다녔다.
문득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의 주제넘은 오지랖을 후회했다.
수행자가 흘리고 간 분실물을 읽어본다.
sahara35 love35 a889 n.. love35 a889 ...
암호인가? 아니면 우주로 보내는 교신인가.
영문과 숫자의 조합이 A4용지에 빼곡히 적혀있다. 아무리 봐도 미물의 머리로는 해독할 수가 없다.
그해 겨울 나는 수행자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에 열쇠 꾸러미와 암호문 한 장을 들고 틈만 나면 역으로 갔지만 그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수행자와 조우
나는 겨우내 얼어 죽지 않고 뻔뻔하게도 진달래가 필 때까지 살아있었다.
음악다방 DJ영준이와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던 날 수행자가 고개를 숙인 채 식당 앞을 지나간다. 얼굴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구부정한 허리와 커다란 배낭으로, 내가 찾던 수행자란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오월이지만 아직도 오리털 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찢어진 잠바에서는 보슬보슬한 깃털들이 빠져나와 뒤따라 걷던 여고생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머리를 조아리고 설득을 해서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분이 네가 찾던 분이냐?"
영준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묵언 수행을 하는지 대답대신 활짝 웃어 주었다. 아마도 그의 언어는 웃음이 아닐까.
"우리 겨울에 살아남았네요. 건배합시다." 웃음.
"많이 드세요." 웃음.
"술 생각나면 이리로 전화하세요."
화실 명함을 주어도 웃음.
주머니에서 그의 열쇠와 암호문을 꺼냈다.
혹시 만날 수 있을까 외출할 때마다 주머니에 넣고 나왔는데 이런 번거로움도 이제 끝났다.
"이거 작년에 주운 건데 돌려 드리겠습니다." 웃음
"제가 허락 없이 읽어봤습니다. 아무리 해석을 하려 해도 실패했습니다. 무슨 뜻인지요?"
암호문을 심각하게 쏘아보더니 웃으며 바닥에 버리려 한다. 손을 막으며 만류했다.
"이거 버릴 거면 제가 가져도 될까요?"웃음
다행히 열쇠 꾸러미는 안주머니에 소중히 보관했다.
난 그동안 해바라기 모종을 옥상 화단에 심은 것과 내키지는 않지만 청림 화랑에서 주문받은 그림을 그린다고 근황을 알려줬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은 거 같다.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하소연에 간단한 위로는 했다. 웃음.
무심한 수행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 세 개를 들고 수행자가 식당 문을 나섰다.
언제 또 볼 수 있냐는 물음에 아무런 기약도 없이 아이처럼 웃기만 했다.
아무리 무소유의 삶이라 해도 망설이다 쥐여준 몇 푼 안 되는 돈도 가져가지 않았다.
목련 여인숙 골목으로 사라져 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암호문을 해독해야 자유로워질 거라는 강박에 포박당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