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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Feb 23. 2023

가을 수강생

여치와의 싸움



악마의 입김 같은 가을 안개가 옥상에 내려앉고 해바라기 소피아로렌은 노랗게 질려서

'해'도 바라보지 못한 채 몽환의 아침을 맞았다.

슬퍼하지 마 소피아로렌, 한 시간이면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뜰 것이니 차분히 기다리고 볼 일이다. 간밤에 무서리가 내렸는지 옥상 바닥이 미끄럽다.

가을이 겨울 속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오후에 음악다방 DJ 하는 영준이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왔다. 이놈은 지난여름 집들이한다고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왔다가 더워서 한 시간도 못 있고 줄행랑을 쳤던 의리 없는 놈이다.

영어 단어라고는 Kiss와 Love밖에 모르던 놈이 팝송에 나오는 영어 가사는 번역을 할 정도로 팝송만 통달하고 있는 기막히고 묘한 인간이다.

Music Box에 빼곡히 꽂혀있는 LP 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건 기본이고, 어떤 가수를 물어봐도 데뷔 연도까지 기억하는 타고난 DJ였다.

"야 우리 다방 단골 아가씨인데 그림 배우고 싶대서 데려왔으니까 잘 좀 가르쳐 줘라."

화실 월세라도 벌어야 되지 않겠냐는 친구의 배려였다. 화실 월세야 그림 한, 두 점 화랑에 떨이로 내다 팔면 될 일이고, 먹이라곤 소주 담배 라면이 전부인데 수강생은 무슨 귀찮기만 했다.

나이는 스물셋 회사원.

여자가 자기소개를 했고 내일 챙겨 올 붓이며 화구들을 적어주고 돌려보냈다.


여자가 돌아가고 영준이와 소피아로렌 화분 앞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셨다.

"야 나랑 쟤는 아무 사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나 여자 많잖냐,  쟤는 내 스타일 아니야."

영준이가 음흉하게 웃었다.

'The House of The Rising Sun'

라디오에서 조그맣게 들리는 팝송

"이거 제목은 해 뜨는 집인데 내용은 전혀 해 뜨는 거 하고는 거리가 있단 말이야 알고 있냐?"

건방진 DJ가 잘난 척을 했다.



화실 옮기고 첫 수강생


"나이도 저희 오빠랑 같으니까 선생님보다는 오빠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그림 그리려면 소묘부터 배우고 수채화 한 다음에 유화를 그려야 된다고 말했지만, 소묘는 지루하고 수채화는 매력 없어서 굳이 유화만 그리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뭐, 그림 배우는데 정해진순서야 없겠지만... 야단치고 싶었지만 한번 참았다.

몇 년의 경험으로 이런 수강생은 한 달을 못 넘기고 포기할 가능성이 백 프로였다.


수강생이 오고 이틀이 지난날 남자 친구가 놀러 온다고 했다.

옥상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니 가관 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수강생 남자친구가 각 그랜저를 끌고 들어와 골목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씩씩 거리며 화실로 올라와 푸념을 했다.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

"그러니까 공터에 세우고 오랬잖아."

수강생이 남자친구를 달래고 있었다.

나이는 나랑 동갑이고 지 아버지랑 꽤나 큰 음식점을 하는 모양이었다.

머리엔 무스를 바르고 금테 안경에 양복을 단정히 입은 모습이 메뚜기보단 날렵한 곤충 여치 같았다.

요즘 신문에 나오는 오렌지족 그 자체였다.

여치가 수강생 옆에 찰싹 붙어 앉아 공냥꽁냥 그림에 간섭을 하며 개지랄을 떨었다.

"야 나도 고등학교 때 그림 좀 그렸는데 이건 원근이 하나도 안 살아 반사광도 없고 배울 때  잘 배워야지 좋은 화실 많은데 뭐 하러 이렇게 후진 화실에서 배우냐."

속삭이듯 말했으나 의외로 내 청력은 소머즈급이어서 내 욕하는 건 기가 막히게 귓구멍 속으로 때려 박혔다.

니기미 배운 지 이틀 됐는데 반사광은 개뿔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수업시간 만이라도 집중하라 말하고 싶었으나
두 번 참았다. 자고로 한국사람은 세 번 참는 게 미덕이니까.


"와! 해바라기 크다."

여치와 수강생이 소피아로렌의 얼굴에 있는 씨를 빼먹으며 감탄을 했다. 꽃보다 아름답지 못한 인간들이 꽃을 잡아먹는, 천인공노할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난 지금껏 꽃보다 예쁘고 무결점의 생명체는 본 적이 없다.

"어이 수강생! 네 얼굴 살점 뜯어먹으면 좋겠냐?"

수강생이 당황해서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해바라기씨 먹은 거 가지고 너무 민감한 거 아니오."

여치가 벽돌만 한 휴대폰을 손에 들고 끼어들었다.

수강생이 말리지 않았으면 저 여치 같은 부르주아 새끼를 아작을 냈을 텐데, 아니면 내 아구창이 날아갔을 수도. 수강생이 여치의 팔짱을 끼고 끌고 내려갔다.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란 듯이.

여치가 못 가게 했는지 그림에 싫증이 났는지

예상대로 일주일도 못 가서 수강생은 나오지 않았다. 팔레트에 잔뜩 짜놓은 애꿎은 유화물감만 굳어가고 있었다.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싸늘한 경계에서

이 세상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야위어 간다. 같이 술 마시던 화분의 꽃들이 모두 죽고 소피아로렌의 큰 손바닥은 살짝 만지기만 해도 바사삭 부서져 버렸다.

소피아로렌이 죽어가고 있었다.


소피아 로렌이 죽으면 여행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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