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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r 02. 2023

학사주점 뜨락

행사전문 트로트가수


동성 화방은 며칠째 문을 닫고 있었다.

은행 융자까지 받아서 화방을 시작했는데 일 년도 되지 않아, 길 건너편에 문구점을 겸한 대형 화방이 생겼다. 물감 사러 오는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다 때려치우고 분식집이라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내려진 셔터에 '개인 사정으로 며칠 쉽니다.' 흰 종이에 써 붙인 안내문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오늘도 물감 사긴 글렀나 보다.


오랜만에 당구장으로 향했다. 대낮인데도 당구장은 빈 당구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의도 끝나고 딱히 곳도 없는 청춘들이 당구장이나 탁구장 음악다방에서 죽치다가 해가지면 학사주점에서 동동주에 파전을 먹으며 암울한 젊음을 낭비하고 있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당구장엔 아는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민석이와, 주형이 두 놈 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한 처지라 신입생들이 큰아빠 취급하며 놀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설마 그럴까? 그럴지도.

저녁에 술값 내기 당구를 쳤는데 역시 당구장 죽돌이들을 이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학사주점 뜨락


언제나 그랬듯이 도토리묵과 파전에 동동주를 시켰다. 이상하게도 화실에서 마시는 동동주와 주점에서 마시는 동동주는 맛이 달랐다.

주점에서 동동주를 직접 만든 것도 아닌데 훨씬 감칠맛이 났다. 분위기 때문일까.


주점 사장이 석호형 안부를 물었다.

석호형은 행사전문 트로트 가수였는데 만약에 가수로 데뷔하면  음악을 할 거라 입버릇처럼 말했고 트로트로 먹고살면서  가수라고 우겼다. 외출할 때면 항상 기타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

아기 공룡 둘리의 마이콜처럼, 그림 배우겠다며 처음 화실에 왔을 때도 기타를 가지고 왔으며 국밥집에 갈 때도 영화 보러 갈 때도 심지어 목련 여인숙 갈 때도 기타는 옆에 있었다.

석호형에게 삐삐를 쳤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타를 어깨에 메고 술 마시러 나왔다. 꺾어 신은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학사주점 사장은 석호형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알고 있는 유일한 팬이었다.

석호형을 보자 술꾼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주점에 속세를 떠난 가수가 왔는데 노래 한 곡  청하겠습니다. 박수 한번 보내주세요."

"아 사장님 쪽팔리게 속세에 살고 있구만 떠나긴 뭘 떠나, 조용히 술 마시고 싶은 손님도 있잖아요."

주점 사장이 또 한 번 말했다.

"조용히 술 마시고 싶은 분들은 술값 안 받을 테니 지금 나가셔도 모른척하겠습니다."

말 같지도 소리, 만약에 술값을 떼먹는 놈이 있으면 몰래 쫓아가서 술값만큼 두들겨 팼을 것이다.

조폭은 아니더라도 시내 양아치 정도는 됐으니까.


주방 앞, 칵테일 빠에서나 볼법한 높은 의자에서 석호형이 폼을 잡고 기타 튜닝을 하면서 행사 멘트를 날렸다.

"1970년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싱어송라이터 이장희의 베스트곡 중에서 편지 불러보겠습니다."

진지한 멘트에 픽 웃음이 났다.

"편지를 썼어요 사랑하는 나의 님께 한밤을 꼬박 새워 편지를 썼어요 몇 번씩이나 고치고 또 고쳐 한밤을 꼬박 새워 편지를 썼어요 간밤에 쓴 편지는 보낼 곳이 없어 조각배 만들어 강물에 띄웠지..."

웃음이 났다가 가슴이 시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나 보다."

석호형이 지난주에 자작곡 한 악보를 들고 기획사 PD를 만나고 온 날 밤 깡소주를 마시며 한말이다. 모든 것은 돈과 빽에서 시작되고 돈도 빽도 없으면 아무리 실력 있는 화가나 소설가나 가수 따위도 환쟁이나 글쟁이 딴따라로 끝나버린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게 죽음밖에 없다고 했다.

빽도 돈도 죽음 앞에선 안 통하니까.

필 받은 록 가수가 팝송까지 불렀다.

비틀스의 'Let it be' 기타는 정말 잘 쳤다.

클랩튼이 앞에 있어도 꿀릴 게 없어 보였고

가수보다는 기타리스트로 성공하는 빠를듯했다.

술에 취했는지 분위기에 취했는지 대학가요제 예선 탈락했으며, 일본어 전공한다고 자기소개한 청바지 여대생이 나와서 이츠와 마유미의 고이비또요를 불렀는데, 외모는 나팔꽃에 매달린 아침 이슬 같았으나 블라우스 단추 두 개를 푸르고 담배를 피우며 부르는 바람에 이키델릭같은 한 매력이 있었다. 남학생들의 휘파람소리와 박수가 시큼한 막걸리 냄새에 찌든 지하 주점에 가득 쌓였다. 청춘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반쯤 취한 석호형을 데리고 화실로 와서 기획사 PD를 안주 삼아 씹으며 술을 마셨다.

"야 너 이 노래 한번 들어봐라 어제 만든 곡인데 슬로우락이고 제목은 억새풀."

'강이 좋아 강이 좋아 강둑에 살지 강둑에는 언제나 바람뿐인데 겨울나무 빈 가지엔 방패연 하나 지나가던 연인들 속삭이는 말 저 풀은 나무였는데 강이 좋아 강이 좋아 키다리 풀이되었지......"

"형! 가사는 좋은데 멜로디는 귀에 안 들어와 대중성도 없고 반복되는 음이 지루해 작곡은 다른데 의뢰해 보는 게 어때 아는 작곡가 많잖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뭐라고 새꺄? 이곡이 어때서 자빠져 자 인마."

매번 이런 식이었다. 충고, 조언이라도 하려 하면 네놈이 뭘 아냐는 투로 싸우려 들었다.

이럴 거면 물어보질 말던가 그렇다고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호형이 말했듯 이곡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데.

화를 내고 먼저 사과하는 쪽은 항상 석호형이었다. 칭찬 빼고는 모든 말에 상처받는 여리고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상처도 빨리 아물었다. 흉터는 곳곳에 남았을지라도.


밤새도록 기타 치며 작곡을 하는 가수 때문에 침낭에 들어가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화장지로 귀를 틀어막은 채 새벽잠을 잤다.

석호형이 TV에서 근사하게 데뷔하는 꿈을 꾸면서.

선잠을 깼을 때 석호형은 없고 소주병에 붙여놓은 메모한 장.

"야! 어제 화내서 미안하다. 폼 나게 살자. 나 행사 뛰러 간다."


옥상의 유배지에서 폼 나게 라면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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