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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y 16. 2023

수행자의 암호문



오늘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사람들 속에는 시인이 있고 철학자가 있었다.


지하철 대합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손을 호호 불며 뭔가를 끄적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들 노숙자라 말했지만 누구도 노숙하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속세를 왕따 시킨 수행자가 맞는 말이다.

가끔 볼 때마다 그가 무얼 쓰는지 궁금했었다.

실례일까 염려되어 조용히 옆에 앉았다. 엉덩이부터 겨울의 냉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한참을 영문으로 된 책에 구멍이라도 낼 듯 활자들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또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열어 논 배낭 속에는 책 몇 권과 파지들이 그득했다.

곁눈질로 그가 쓰는 글을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다. 필사를 하는 것인지, 시를 쓰는 것인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당황한다. 주섬주섬 빠르게 배낭에 쑤셔 넣고 도망가 버렸다. 얼마나 빨리 뛰어가는지 반쯤 닫은 배낭에서 종이 쪼가리 한 장과 열쇠 꾸러미가 떨어졌다. 어디로 갔을까

역 광장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시계탑은 오후 다섯 시를 알리고 있었다. 대합실에서 막차가 끊길 때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맡기면 그가 찾아갈까, 그럴 일은 없을 거 같다. 살짝 쳐다만 봐도 도망을 갔는데 분실물 찾으러 역 사무실로 온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암호문


pfsah35love35a889n......love35a889n

암호인가? 아니면 우주에 보내는 교신인가.

영문과 숫자의 조합이 a4용지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해독할 수가 없다.

버리려다. 마음에 걸리는 단어 하나.'love'

love만 커다랗게 클로즈업 됐다.

마음이 아팠다. 왜 아팠는지는 모르겠다.

열쇠고리에 매달려있는 열쇠 다섯 개,  주운 것인지 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차 키

네 개는 집 열쇠였다. 혹시 집이 있다면 문은 어떻게 열었을까, 괜히 주워서 밤새 생각만 많아졌다. 아니면 또 다른 인연일지도.


첫차가 오기 전에 대합실로 뛰어갔다.

열쇠 다섯 개와, 암호문 한 장이 그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할지도 모를 일이다. 암호문의 내용이 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대합실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없었다.

그가 앉았던 벤치엔 누가 먹다 남겼을까, 빈 소주병과 새우깡 알갱이들만 소복이 쌓여 있었다.

한 달 동안 틈만 나면 대합실로 갔다. 함박눈 오던 날도, 겨울비 내리던 날도, 바람 부는 날도 어깨를 움츠리고 가보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부탁을 했다.

"내가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으니 그가 나타나면 꼭 연락 좀 주십시오."

역무원에게 삐삐번호와 화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지만 해가 바뀌고 진달래가 피어도 역무원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해 겨울나는, 열쇠와 암호문 한 장을 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강박에 포박당해 있었다.



자유인과의 조우


음악다방 날라리 DJ 영준이와 원주 식당에서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던 날, 밖에서 수행자가 지나간다. 겨우내 애타게 찾던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식당 앞을 지나간다.

얼굴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구부정한 허리와 커다란 배낭으로, 내가 찾던 자유인이란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오월이지만 아직도 오리털 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찢어진 잠바에서는 보슬보슬한 깃털들이 빠져나와, 뒤따라 걷던 젊은 여자의 신경질 위로 내려앉았다.

떡진 머리에 목까지 내려온 수염. 행색이야 어떻든 남들이 노숙자라 부르든 상관없이 내 눈에는 자유의 냄새가 나는 수행자다.

서로가 변방의 낡은 성에  고립되어 비루하게 버티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꿀릴 것 없었다.

유일한 나의 동지, 눈물겹게 반가웠다.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배가 고파서인지 도망가지 않고 따라왔다.

식당 사장이 인상을 쓴다.

뼈다귀 해장국 하나 더 시켰다.

"이분이 네가 찾던 분이냐?"

영준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난 한 번도 앞에 있는 자유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묵언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언어는 활짝 웃는 것이다.

"몇 달 못 본 것 같습니다." 웃음.

"우리 겨울에 살아남은 거 건배합시다." 웃음.

"많이 드세요."웃음.

"아픈 덴 없죠?" 웃음.

"술 생각나면 이리로 전화하세요."

화실 명함을 주어도 웃음.

주머니에서 그의 열쇠와 암호문을 꺼냈다.

외출할 때마다 주머니에 넣고 나왔는데 이제  번거로움도 끝이다.

"이거 작년에 주운 건데 돌려 드리겠습니다." 웃음

"제가 허락 없이 읽어봤습니다. 아무리 해석을 하려 해도 실패했습니다. 무슨 뜻인지요? "웃음.

암호문을 심각하게 쏘아보더니 웃으며 바닥에 버리려 한다. 손을 막으며 만류했다.

"이거 버릴 거면 제가 가져도 될까요?"웃음

다행히 열쇠는 안주머니에 소중히 보관했다.



무심한 수행자


난 그동안 해바라기 모종을 화분에 심은 것과  내키지는 않지만 청림 화랑에서 주문받은 그림을 그린다고 근황을 알려줬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거 같다.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하소연에 간단한 대답을 했다. 웃음. 커다란 배낭을 메고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 세 개를 들고 자유인이 가버렸다.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그를 바쁘게 따라갔다. 오리털들이 아카시아 꽃잎처럼 흩뿌려졌다.

야속한 사람.

언제 다시 보자는 기약이라도 하고 가지.

아무리 무소유의 삶이라 해도

몇 푼 안 되는 돈이라도 가져가지.

목련 여인숙 골목으로 사라져 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매정한 사람.

한 번만 돌아보지.


그가 선물로 준 암호문 한 장을 명랑 문방구에서 코팅을 했다.

화실 볕 잘 드는 곳에 압정으로 고정해 놓았다.


암호문을 해독하면 나도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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