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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롱이 Sep 15. 2024

덩그러니 남은 숟가락을 떠올리며~

경주해장국

오전 6시 30분 숙소에서 나와 불국 로터리 부근으로 걸어간다. 사적 경주 구정동 방형분을 답사하고 경주 시내로 나가는 10번 시내버스를 탄다. 동궁과 월지 정류장에 내려 반월성, 경주향교, 내물왕릉, 계림, 대릉원과 첨성대를 답사하고 아침 식사를 하러 팔우정 해장국거리로 향한다. 2016년 처음 방문하고 2024년 9월 해장국을 먹으러 다시 찾는다.


오전 8시 47분 팔우정 삼거리에 도착한다. 대기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은 보이나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드물다. 10여 기의 규모가 작은 봉분들이 보인다. 사적 황호동 고분군이다. 고분군 앞으로 주황색 간판에 검은 글씨로 ‘해장국거리’란 길쭉하고 큰 간판이 보인다. 경주 황오동 팔우정 해장국거리다.


해장국거리 맞은편에 경주 팔우정 공원이 있다. 팔우정은 최 씨 '배반파(排盤派)'의 여덟 형제가 우애를 돈독히 하며 살았던 유서 깊은 정자다. 팔우정 옛 정자는 사라지고 '팔우정유허비'와 '팔우정(八友亭)'이라 쓴 비석 하나가 서 있다.


팔우정이 있어서 '팔우정 로터리'라고 불렸다. 1990년대 초 심야영업 금지 당시 관광특구로 지정돼 24시간 영업이 가능해지며 해장국 집들이 20~30곳으로 늘어나면서 '팔우정 해장국거리'가 되었다. 2021년 12월 28일 폐역이 된 경주역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어 현지인뿐 아니라 관광객도 많이 찾았다.


2016년 팔우정 해장국거리에 들렸다. 상호 글씨만 다르고 간판과 출입문 모양이 같은 해장국집들 6~7곳이 올망졸망 붙어 있었다.


그중 첫머리에 있었던 '팔우정해장국' 집으로 들어갔다. 팔우정 해장국거리 터줏대감이자 가장 많이 알려진 식당이었다. 메뉴는 '해장국' '선짓국' '추어탕' 3개만 팔았다.


해장국을 주문했다. 6,000원이었다. 진갈색 끓인 결명자 물을 내주었다. 해장국은 뚝배기에 메밀묵, 두절(頭切, 대가리를 떼어낸 콩나물) 콩나물을 담았다. 시원하고 맑은 국물을 내기 위해 콩나물 대가리를 일일이 따낸다고 했다. 북어, 다시마, 새우, 멸치로 우려낸 육수로 토렴했다. 마자반(모자반을 주인 할머니는 마자반이라 부르셨다.), 썬 김치, 다진 마늘을 얹고 참기름, 양념간장을 뿌려 나왔다. 밥은 따로 내주었다.


해초, 메밀묵, 육수, 신김치, 두절 콩나물 등 해장에 좋은 재료가 어우러진 시원하고 독특한 해장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2016년 경주 팔우정 해장국 거리(사진 좌)/팔우정해장국 묵 콩나물 해장국(사진 우)

‘해장국거리’ 간판 뒤로 허름한 2층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 아래로 6~7곳의 해장국을 파는 식당들이 올망졸망 붙어 영업한 거로 기억하고 있었다.


2층 건물을 지나 70여 m을 걸어도 2016년 맛보았던 해장국거리 원조 격으로 알려진 ‘팔우정해장국’뿐만 아니라 기억 속 해장국 식당들도 보이지 않는다. 건물은 사라지고 황호동 고분군의 봉분만이 고봉밥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다. 신문 기사를 보니 경주시 쪽샘지구 정비 공원 조성으로 시와 협의 후 보상금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문을 닫았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간다. 팔우정 버스 정류장 밑으로 ‘토박이할매해장국’집이 보인다. 외관은 깨끗해 보이고 출입문에 ‘메밀해장국’과 ‘영업시간 아적 5시부터 저염 3시까정 하니덩’란 경상도 사투리가 적혀 있다. 출입문을 열려 하니 닫혀 있다. 창문으로 내부를 보니 텅 비어 있고 쓰레기들만 남아 있다.


다시 팔우정 삼거리 방향으로 올라간다. 허름한 2층 건물 1층에 ‘경주해장국’집이 있다. ‘SINCE 1973 경주해장국’ 상호가 쓰인 간판과 ‘묵 콩나물 해장국, 미꾸라지 추어탕, 한우 선지국’이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경주 팔우정 해장국거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해장국집으로 확인된다.


오전 8시 52분 출입문을 우측으로 밀고 들어선다. 출입문 우측으로 열린 주방이 있다. 연세 드신 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계신다. 남자분은 서빙 및 손님 응대를 하시고 여자분은 음식을 만든다. 두 분 다 수수한 인상에 차분하게 손님 응대를 한다.


9월 초지만 아직 날이 뜨겁다. 여러 곳을 답사하고 와 땀이 나고 있었다. 남 사장님이 에어컨 앞자리로 안내해 준다. 자리에 앉아 찬물 한 잔을 들이켜고 해장국을 주문한다.


물 한 잔을 더 마시며 식당을 살펴본다. 식당 내부에는 4인용 식탁 8개와 2인용 식탁 1개가 있다. 손님 10여 명이 식사하고 있다. 메뉴는 외부 간판과 다르게 추어탕은 없고 해장국(9,000원)과 선짓국(9,000원)만 판매한다.


에어컨 옆 냉장고에 메뉴 설명을 한 종이가 붙어 있다. 묵 콩나물 해장국에 대한 설명이다. “콩나물과 메밀묵이 들어가 있는 경주식 콩나물 묵 해장국 멸치와 다시마, 생태, 콩나물 등으로 우려 낸 맑은 육수에 메밀묵을 채 설어 담고 그 위에 삶은 콩나물, 쏭쏭선 씬 김치, 바다 향기 가득한 해초(모자반)등을 올려 놓은 콩나물 묵 해장국 위에 양념장을 조금 넣어서 밥 말이서 메밀묵과 함께 먹으면 숙취 해소에 아주 좋아요”


글을 읽자, 무심결에 눈이 향한 건 열린 주방이다. 여사장님이 먼저 주문한 손님들의 해장국을 준비한다. 저절로 걸음은 열린 주방으로 향한다. 여사장님께 허락을 받고 해장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는다.


여사장님은 먼저 은빛 양은 쟁반에 밑반찬과 밥을 담아 놓는다. 그런 다음 갈색 그릇에 메밀묵과 모자반을 담고 가스레인지 위에 끓고 있는 자그마한 국솥 안 육수를 국자로 대여섯 번 부었다 따랐다 한다. 토렴이다.


토렴을 끝낸 그릇에 모자반, 다진 마늘, 썬 김치, 양념간장을 얹고 참기름을 뿌린다. 묵 콩나물 해장국이 완성된다. 미리 차려진 양은 쟁반에 완성된 해장국을 올리면 남 사장님이 손님상으로 나른다. 여사장님의 작업은 반복된다. 날렵하면서도 차분한 손길에서 세월의 힘이 느껴진다. 자리로 돌아가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에 앉고 5분 정도 지나 남 사장님이 색바랜 양은 쟁반에 토렴한 해장국, 공깃밥, 땅콩이 섞인 콩자반, 깍두기, 양념 멸치무침 등 밑반찬을 담아 내온다. 수수하고 단출한 해장국 상차림이다. 집밥 느낌이 물씬하다.


투박한 그릇에 담긴 해장국을 훑어본다. 열린 주방에서 여사장님이 만드는 과정을 본 해장국이다. 고소한 참기름 내음이 여리게 코끝을 스친다. 입맛을 돋운다.


맑은 국물 위로 채 썬 갈색 메밀묵, 가느다란 몸통에 노란 대가리가 달린 데친 콩나물, 포도송이 모양의 흐린 푸른빛을 띠는 모자반, 붉은빛 송송 썬 신김치, 파와 고추를 넣은 빨간 양념간장, 하얀 다진 마늘 등이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장국 육수는 명태, 멸치, 다시마, 표고버섯, 말린 모자반 등을 넣어 우려낸다고 한다. 감칠맛이 폭발하는 식재료들이다. 섞지 않고 메밀묵 부근 국물만 한 술 떠먹는다. 자극적이지 않다. 감칠맛이 은은하다. 몇 술 더 맛본다. 감칠맛과 시원한 맛이 입안을 휘감친다. 미지근함과 따뜻함 경계에 있는 국물이 거부감 없이 입술과 혀를 거쳐 내장으로 술술 넘어간다.


모든 재료를 뒤섞어 크게 한술 떠먹는다. 콩나물 몸통은 맛보다는 아삭한 식감으로, 대가리는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금하다. 잘게 썬 신김치는 무르지 않고 시금하다. 콩나물보다 굵게 채 썬 구수한 메밀묵은 보드랍게 뭉개지며 훌훌 넘어간다. 모자반은 톡톡 씹히며 어금니에 독특한 식감을 각인시키고 감칠맛을 더한다. 양념간장은 담백한 국물에 간을 맞추고 함께 넣은 파와 고추는 사이사이 제 식감과 맛을 보탠다. 다진 마늘도 아리지 않고 풍미를 더한다.


콩나물국, 메밀 묵사발, 몸국, 김칫국 등 여러 음식을 떠오르게 하는 해장국이다. 바다와 육지의 감칠맛 나는 식재료를 사용했지만 진하지 않고 여운이 길게 남는 개운하고 독특한 해장국이다.


해장국 육수의 온도가 높지 않다. 밥을 토렴하지 않는다. 탁하지 않은 맑은 육수를 내기 위함인듯하다. 따로국밥 식으로 공깃밥을 내준다. 밥이 고슬고슬하지 않고 된 밥이다. 밑반찬과 함께 먹는다. 달지 않고 단단한 깍두기는 신맛을, 땅콩이 섞인 콩자반은 고소하고, 양념 멸치볶음은 감칠맛이 도드라진다.


해장국에 남은 밥을 말고 짭짤한 양념간장 한스푼을 넣어 간을 맞춘다. 잘 섞어서 훌훌 먹는다. 담백하지만 여운 깊은 감칠맛의 육수. 알맞은 국물의 온도를 맞추는 토렴. 메밀묵, 콩나물, 모자반등 해장에 어울리는 식재료의 사용. '배려와 정성'이 듬뿍 담긴 해장국이다.


그릇에 밥 한 톨 국물 한 모금 남지 않았다. 속이 시원하고 두둑하다. 몸과 마음을 보듬은 해장국 한 그릇이다.


"잘 먹고 갑니다" 진실된 말을 남긴다. "잘 가요" 하며 노부부가 동시에 말을 건넨다. 목소리에서 살가움이 묻어나온다.


출입문을 밀고 나온다. '경주해장국' 간판과 '해장국거리'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언제 올지 모르겠다. 팔우정 해장국거리 마지막 남은 해장국집, 추억의 맛을 가슴에 담는다. 텅 빈 그릇에 덩그러니 남은 숟가락을 떠올리며 언제든 떠 먹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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