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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Nov 18. 2023

정전이 되니 뜻밖의 감사함이..

작은 것에 감사

정전이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유독 정전이 자주 되는 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길다. 벌써 세 시간이 넘어간다. 이럴 땐 전기세가 좀 비싸더라도 자가발전기가 있어 정전걱정 없는 아파트로 이사 가야 하나 싶다.


다행히 밤이 아닌  시간라 어둠과의 전쟁은 없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더운 이곳은 전기가 없으면 더위와의 전쟁이 바로 시작된다. 보통 정전이 되면 카페로 가서 더위를 식히는데 곧 들어오겠지 하며 기다린 게 벌써 몇 시간이 흘러 버렸다.


기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냥 멍하니 있기보다 물청소라도 해야지 싶어 밀대를 들었다.


보통은 청소를 할 때 북튜버가 읽어주는 책을 하나 골라 실행시키고 멋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작은 가방에 넣고 어깨에 멘다. 그러면 청소가 지겹지도 힘들지도 않고 책에 정신 팔려 후딱 일을 하고 샤워를 하면 된다.


하지만 와이파이가 되지 않아서인지 데이터도 잘 터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조용히 청소하는 수밖에..


밀대걸레를 힘주어 밀며 일층을 돌아다닌다. 이게 걸레에서 나온 물인지 내 몸에서 흐르는 땀인지 분간이 안된다. 그래도 청소를 마무리해야지 싶어 무거운 몸을 두 다리에 맡기고 밀대를 들고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간다.


더운 공기가 훅 하고 내 몸을 강타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이층에 있는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어라. 기대하지도 않은 시원한 바람이 나를 위로한다. 보통 에어컨을 틀다 보니 문을 자주 열어두지 않는데 오래간만에 자연바람이 시원하게 내 몸을 휘감는 게 너무 좋다.


산들바람의 유혹에 그냥 청소를 잠시 놓아두고 에세이집을 하나 빼서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마치 혼자 영화라도 찍고 있는 듯 황홀경에 잠시 빠져본다. 전기가 없으니 또 이런 소소한 시간이 내게 주어지나 싶고 작은 감사가 불평을 모두 쫓아버린다.


그러고 보니 책 읽는 걸 참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 거의 읽지 못했다. 주변에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도 없고 공사하는 기계 소리도 없다. 간간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만 있고 에세이를 읽어가는 내 목소리만 있다.


이렇게 들어보니 내 목소리도 꽤 좋게 다가온다. 역시 분위기는 사람을 취하게 하나보다. 하하하.


홀로 에세이 한 권을 소리 내어 다 읽어내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간다.


밀대걸레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이층을 청소한다. 먼지는 닦아도 닦아도 나보다 더 부지런히 쌓이고 사춘기 딸아이의 머리카락은 사방팔방에 흩어져있다. 의쌰의쌰 그래 또다시 쌓일 먼지라도 힘내서 닦아내자. 그래야 아이가 좀 더 깨끗한 곳에서 지낼 수 있으니.


35도의 기온에 어떤 전자제품의 사용도 없이 자연바람의 위로만 받으며 청소를 겨우 마치고 깊은 한숨을 쉬려 허리를 쫘악 펴니 드디어 <삐리리리리리> 냉장고가 부활하며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고 알려준다.


야호! 걸래 빨고 샤워하고 이제 시~원한 물을 냉장고에서 꺼내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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