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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Jun 20. 2022

작은 아이가 태어나다. 두 번째 출산기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며칠 쉬었다. 아이는 벌써 다섯 살이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늘 아이와 놀아만 줄 수는 없었다.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좀 딱해 보였다.  남편에게 그래도 둘은 있어야 서로 친구도 되고 의지할 수 있지 않겠냐며 일을 쉬는 동안에 작은 아이를 갖자고 했다. 바로 생길 줄 알았던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아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그러고 한 3개월 정도 지났나.. 예전 회사에 같이 다니던 동생이 전화를 했다. 어학원에서 영어 선생님을 구하는데 일해보지 않겠냐고. 안 그래도 회사 말고 전혀 다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나는 바로 하겠다고 하고 이력서를 챙겨갔다. 원장이 내가 맘에 드는지 바로 일을 해줬으면 좋겠단다.


그렇게 나의 어학원 생활은 시작되었고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대학 때도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쳐 봤지만 십수 년 전이라 그런지 학부모, 학생, 새로운 교재들, 동료 교사와의 문제 등등 힘든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의 적응기간이 지나니 슬슬 요령도 생기고 애들, 학부모들과 소통도 편해졌다. 학부모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일부러 자기 아이를 내 반에 배정해달라고 원장에 전화를 넣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나고 몸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산부인과를 갔다. 아이가 생겼다. 아무 생각 없이 일에 몰두했더니 아이가 찾아온 거다. 동료 선생님 중에서도 영국인 선생님 커플은 마치 자기가 임신을 하기라도 한 듯 너무 기뻐해 주셨다. 나는 임신을 해도 배만 딱 나오는 유형이라 옷으로 잘 커버하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학생들 중 저학년 아이 하나가 볼 때마다 조금씩 나오는 배가 이상한지 8개월쯤 되었을 때 "선생님, 점점 뚱뚱해지시는 것 같아요" 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만삭이 되고 학원을 쉬게 되었다. 둘째도 여자 아이란다. 첫째처럼 이 아이도 예정일이 다 돼가는데 거꾸로 뒤집는 바람에 또 매일같이 상체는 바닥으로 엉덩이를 높이 드는 고양이 자세를 했다. 신기하게 막달에는 공간이 부족해 돌아오기 힘들다는 태아의 자세가 이번에 또 돌아왔다. 한 번도 어려운데 둘 다 막달에 다 자란 몸으로 비좁은 자궁 안에서 두 번을 뒤집다니 보통애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이 아이도 예정일을 넘긴다. 전혀 내려오려고 하지도 않고 나올 준비를 하지 않는다. 큰 아이를 받아주신 의사가 곧 해외 세미나를 가야 하니 둘째도 유도 분만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늘 아들을 낳기만을 기대해 온 시어머니는 그냥 아이가 나올 운명일 때 나오게 자연분만을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신다. 뭐든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나는 큰 아이를 유도 분만해 봤으니 작은아이는 그야말로 '자연분만' 해보자 생각했다. 예정일이 지나고부터 혼자 부지런히 산책을 했다. 큰 아이 때와는 달리 빈혈도 없었고 두 번째라 뭔가 자신감도 좀 생겼다.


작은 시누이 결혼식이 있다. 첫째 때 빈혈이 심해서 그런지 만삭 때 마산 시댁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예식장에서 쓰러질 뻔한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어(그 당시 느낀 건 나는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더라도 100% 이해를 해 줄 수도 없고 그러지도 않는다.) 막내 결혼식인데도 자신이 없었다. 시누이도 자기가 더 걱정되니 오지 말란다.


매일 산책을 했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걸었다. 저녁부터 배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다. 첫째를 촉진제 맞고 유도 분만했던 터라 진짜 자연진통은 처음이었다. 나름 책을 통해 공부를 많이 했는데 헷갈린다. 이게 가진통이라는 건지 진진통인지.. 그러다 조금씩 더 아파왔다. 공부한 대로 집에서 최대한 참고 버티다가 마지막 무렵에 병원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진통이 진행되는 간격을 체크했다. 저녁부터 시작된 게 새벽 3시 무렵에는 5분 간격으로 아프다. 첫째와는 달리 허리로 진통이 오지 않아서 인지 버틸만했다. 5분 간격의 진통이면 제법 진행되었다 싶어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간호사가 체크해 보더니 벌써 자궁이 5센티나 열렸단다. 속으로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런데 첫 아이 때 와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관장을 하기엔 진행이 이미 너무 많이 되었다고 그냥 하지 않는 게 낫겠단다. 두 번째 인데도 내가 모르는 게 여전히 너무 많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름 출산 경력자라 자만했던 나를 한없이 탓했다. 그냥 더 일찍 병원 올걸 후회스럽다. 벌써 자궁문은 다 열렸는데 아이가 내려오질 않는다. 오전 7시, 간호사가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마디 한다. "같이 온 다른 산모는 벌써 애 놨어요.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에고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내가 더 답답하지..


오전 9시쯤 아이가 내려오는지 갑자기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여든다. 첫 애와 같은 병원이었지만 담당의사는 해외 세미나 가셨고, 진통은 참을만했으나 낳는 과정이 또 큰 애와 반대로 너무 힘들다. 아무리 힘을 줘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내 눈으로 보지는 못 했지만 아마도 관장을 하지 않아 힘주는 과정에서 변이 나온 모양이다. 나름 철저히 준비한 두 번째 출산인데 뒤죽박죽 되어가는 느낌이다. 참담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위로 올라와 배를 누르고 아래서는 잡아당기고 아주 전쟁을 방불케 한다. 그래도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러기를 2~30분(너무 정신이 없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긴 실랑이 끝 오전 9시 40분경 아이가 태어났다. 이번엔 회음부 절개도 많이 되었는지 내내 불편하고 힘들었다.


둘째는 출산이 어렵지 않다는데 6년 만이라 힘든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전혀 다른 이유로 너무나 힘든 출산이었다. 하긴 24시간 진통 끝에 산모도 힘이 다 빠져버려 결국 수술을 한다는 사람도 있다니 내 경우는 순산으로 봐야 하나..


그렇게 또 2박 3일을 병원에서 지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집에 가니 유치원생인 큰 아이가 너무 신기하다며 안아보고 싶다고 난리다. 바닥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게 한 후 부드러운 이불에 돌돌 말린 신생아 동생을 두 다리 위에 올려줬다. 동생이 생긴 게 너무 신기한지 싱글벙글 좋아한다.


이제 회사는 가지 않아도 되니 혼합수유를 한 큰 아이와 달리 작은 아이는 모유수유가 가능했다. 엄마젖에 너무 집착이 심해 19개월을 모유만 먹고 억지로 끊었을 정도다. 모유만 먹이니 내 몸의 회복도 더 빠른 느낌이다. 그 당시 내 몸무게가 42킬로 정상체중으로 돌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물론 14년이 지난 지금은 십의 자리 숫자가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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