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일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는 사람. 한눈팔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계속해서 다양한 일을 배우고, 성장하는데 관심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한결같을 수는 있으나.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그런 사람은 아닐 것 같다. 그런 말들. 한 자리를 지키는 게, 오래 남아있는 게 강한 것이고 이기는 것이라는. 많이 듣는 말이다. 나도 동의하는 바고 때론 그런 모습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여기저기 들여다 보는 일을 좋아한다.
지겨움이라고 해야할까. 권태라고 해야하나. 그런 감정들도 자주 느끼는 편이라. 나는 작은 것들에 변화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 펜이 떨어지면 꼭 다른 종류의 펜을 써보고 싶다. 예쁜 노트를 발견하면 다음번엔 지금과 다른 그것을 꼭 사보기로 한다. 한가지의 끝을 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꼭 다른 것,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10년 동안 이 펜 하나만 써요. 필사 노트는 변함없이 이거예요. 라는 말은 할 수 없다.
학과, 직업, 일에서도 다양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며 기웃거리는 내가. 작은 것들 앞에서 호기심을 멈출리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호기심. 내가 그것들을 궁금해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너무 많은 이유가 있고 그래서 그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냥 궁금한 걸 어떻게. 궁금하면 해봐야하지 않나. 나는 타인의 마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궁금한 걸 참으려고 하진 않는다. (참지 못하는 건가?) 필사 노트의 끝이 다다르면 나는 어떤 새로운 노트를 사서 써볼까 궁금해서 문구 코너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딱 그때 마음에 동하는 노트를 골라 데려온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노트를 펼쳤다. 이번에는 갈색 표지, 미색 내지, 글씨가 잘 써지는 적당한 질감. 그러나 스프링을 가진.
필사는 오래 해봤지만 필사책은 처음 읽어봤다. 내게 필사는 독서 이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서 필사를 위해 만들어진 책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중에 나와있는 다이어리처럼, 독서기록장들처럼 뭔가 써넣어야 되는 내용이 많고 나와 다른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피해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 편견이었지만. 최근에 필사를 위한 책을 만날 기회가 있어 읽어보면서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깨졌다. 책을 읽고 마련된 공간에 필사를 해보며 이 책을 만나는 사람을 고려하는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180도로 펼쳐지는 제본에, 연필과 펜 어떤 것이 올라가도 적절한 종이의 코팅. 많지도 적지도 않은 필사 문장의 양. 이것들을 느끼며 책을 만들 때 드는 품, 그 노력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누드 사철 제본이라고 말하던데. 이름은 사실 잘 모르지만. 책의 겉모습만 봐도 눈에 띄는 제본의 형식이었다. 그리고 표지 한 장만 넘겨봐도 알 수 있었다. 필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잘 펼쳐지도록 만들었구나.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스프링 제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문장의 끝 쯤가면 꼭 새끼손가락에 걸리는 것. 그래서 마지막 글자들을 못나게 만드는 스프링. 스프링 노트가 좋아서 그것만 골라 쓰는 친구들도 있던데. 그 이유는 뭘까. 나는 문장과 페이지의 마지막즈음에 가서 꼭 불편함을 느끼게하는 그 녀석의 장점을 잘 모르겠다. 고르자면 일반적인 노트. 제본의 형식. 그 정도도 딱히 나쁘다는 생각없이 사용해왔는데. 한 장만 넘겨도 알 수 있는 완벽하게 펼쳐지는 그 각도는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앞으론 그런 제본의 형식을 가진 노트에 눈이 갈 것 같다. 나의 작은 선호가 생겼다.
필사책에서 생겼던 또 하나의 선호가 있다. 종이의 질감. 종이의 질감에 대해 생각해본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최근에 옥스포드 노트패드에 필기를 하다가 깨달았다. 매끈한 종이 질감은 글씨게 예쁘게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선호하지 않게 될 거란 것을. 워낙 많은 글을 쓰다보니 한글자, 한글자 대단히 정성들여 쓰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미끄러워 글씨가 휘날리는 걸 볼 때면 불편한 마음이 들기 때문에. 적어도 오래 남길 기록을 할 때만큼은 그런 질감의 종이는 피하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종이의 질감을 고려해가며 노트를 고른 것은 아니었는데. 새로 시작한 필사 노트의 종이 질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당분간은 여기 정착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리고 필사책의 종이 질감도 딱 그런 정도였다. 아주 미끄러진 않고, 외국의 옛날 책들만큼 거칠지는 않은 적절한 정도의 거칠기. 또는 부드러움. 사각사각 연필이 오가는 느낌이 좋지만 번지지 않는 적절함을 가져 펜을 써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런 질감. 종이의 코팅이 필기감에 이렇게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 깨닫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섬세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사람의 모습이 그런 쪽은 아니라서. 너그럽고 여유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다만 궁금해 할 뿐 나의 특별한 선호 앞에서 일부러 더 눈을 감았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뾰족한 선호가 곧 까탈스러움은 의미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많은 경우 이어지기는 하는 것 같지만... 감각을 제한하지 말고 조금 더 펼쳐보며 나의 선호가 생기는 것을 막지는 말아야겠다. 내가 바라는 모습과는 좀 다를지 몰라도. 작은 감각들에 집중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또 새로운 즐거움이다.
마음을 열고 나에게 먼저 너그러워지자.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가는 것을 불편해 하지말자. 느낄 수 있는데 아닌척하는 것은 또 올바른 방향이 아닐테니까.
필사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나에 대해 알게되는 것이 자꾸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