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성실하게

by 윤슬

성실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자란 나는. 아직도 성실함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변치않는다는 건 믿지 않는다. 모든것은 변화하고 있고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은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인간에게서 그 정도의 힘을 기대하지 않고 그럴수도 없기에. 영원보단 변화가 더 자연스러운 수 밖에 없단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성실하게 임하는 그 무엇도 영원할거라 생각하지않는다. 그리고 이 곳에 어떤 일이 있든 머물러야 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다만 매일의 크고 작은 성실함이 쌓여 언젠간 그것이 나의 자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움직여 볼 뿐이다.


필사하는 문장들은 그렇지 못한 문장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어디선가 만나면 그 문장이 익숙하다는 어렴풋한 느낌 정도는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억력은 그 어떤 것보다도 영원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문장들은 잠시 기억에 남았다가 사라지고 만다. 필사하던 노트를 덮는 순간 문장의 반쯤은 머리 속에서 떠나고, 뒤돌아서 다른 일을 시작하면 이미 대부분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문장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없어졌을지언정 문장의 가르침은 어딘가에 남아 나를 움직이고 있다. 그런 문장을 좋아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날 다시 노트를 넘겨보았을 때. 어느새 지난 날에 와닿았던 그 문장을 체화하고 있는 나를 발견 했을 때. 그런 순간이 내 필사의 원동력이 된다.


문장들은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지만, 유난히도 순환이 잘 되지 않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이면 몸도 마음도 꽉 막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문장들 그 어느것도 다 소용 없게 된다. 며칠 전의 나에겐 꼭 그런 날이 찾아왔다. 그런 날엔 할 일들이 쌓여 있어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잠이나 자볼까하기도 하지만 할 일들이 이마 위에 아른거리고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다. 그렇다면 며칠 제쳐두었던 필사노트를 꺼내어 생각없이 문장들을 써본다. 필사하려고 모아둔 책들을 순서대로 쓰고 있었다. 마침 순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 마음이 답답한 날을 위해 이 책 앞에서 멈췄었나보다.


책에서 필사하려고 모아두는 문장들을 크게 나누어보자면. 내가 했던 생각과 비슷해 공감되는 문장과 내가 닮고 싶은 생각을 담은 문장.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의 문장들은 전자에 가까운 문장들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서 이 철학자의 마음을 따라가다보면 공감되는 지점을 더 많이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 문장들을 되새기는 시간 동안엔 조금 결이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각자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을수록, 그래서 그 결과로 기쁨의 근원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을수록 더욱더 행복한 존재가 될것이다.”


내가 하는 일만 잘 하면된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내 손을 떠난 일들에 대해서는 걱정하면 하지 말자. 사실 내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있을까.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큼 시간 낭비인 일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처음하는 일에서 처음부터 완벽을 바라고. 그래서 누군가 나의 결과물에 혹평할까봐 두려워하고. 누군가의 반응을 통해 행복해지려고 하고. 그게 불안과 불행의 근원인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나의 성장보다 누군가의 긍정적인 평가에 매달렸다. 내면을 파고드는 마음과 외부와의 소통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싶었는데. 이번엔 외부로 너무 많이 나가 버린 듯 싶다. 그 사이 어딘가 완벽한 균형을 찾기위한 외줄타기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나 보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고통이나 시련을 겪더라도 침착함과 의연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재난이 얼마나 거대하고 엄청나게 많은 것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상의 많고 많은 고통들 사이에서 나의 고통은 너무나 미약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의 이 정도 불행쯤은 행운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 나의 긍정은 대부분 더 많은 고통을 상상하는 힘에서 나왔다. 붕붕 떠다니던 상상의 세계에는 동화같은 아름다움만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일어날거라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끔찍한 불행이 가득해서 그것들을 생각하다보면 현실의 불행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는데. 자꾸만 현실에 내려와 살다보니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지겨운 불행들만을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의연하지 못하고 현실을 불행이라 생각하고, 침착하게 임하지 못하고, 또 도망치고 싶고…그래서…




세상 앞에 의연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던 나의 다짐은 문장을 떠날수록 자꾸 희미해지고 옅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들을 여러번 자꾸만 새기는 것이다. 잊혀지는 문장들을 다시 새겨넣고를 반복하는 일이야 말로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를 세상에서 살게하는, 움직이게 하는 마음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나는 필사하는 일을 멈출수가 없는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나는 성실하게 생각들을 배우고 내 안에 쌓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물리치고 이겨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지고 싶은 마음들을, 쫓고 싶은 생각들을 매일매일 성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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