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할 때 필요한 것 중 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필사를 위한 준비물을 최대한 간소화하려고는 하지만 펜은 어떤 방식으로도 빠질 수 없다. 나는 문구류에도 꽤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여러가지 색의 펜을 써보는 것을 좋아한다. 필요에 의해서 쓰게 되는 펜은 대부분 검정색. 나도 검정색 펜을 가장 많이 쓴다. 잉크 끝까지 다 쓰는 펜도 역시 대부분 검정색이다. 그러나 필사를 할 때에는 조금 다르다. 제목과 날짜, 느낀점은 검정색으로 쓰지만, 책의 문장을 쓰는 정말 “필사”를 할 때에는 책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그 순간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른다. 시작 전에 색을 고르는 의식. 그 순간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운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필기감이 마음에 드는 검정색 펜을 사는 것도 좋지만, 예쁜 색의 펜을 볼 때에 더 설레는 것 같다.
펜. 필기구에 대한 오랜 취향이 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펜, 샤프…그 무엇이든 유격이 있어 흔들리는 그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다른 특성은 그래도 싸워 이겨가며 참는 편인데, 촉이 흔들리면 더 나아가 쓰지를 못하고 내려놓는다. 흔들리는 펜을 만나면 어떤 글자도 쓰고 싶지 않아서 나는 좋아하는 펜 하나 정도는 챙겨서 다니는 편이다. 평소에 이름이라도 쓸 것 같으면 펜을 챙겨다니는 사람이라. 제대로 뭘 써보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필통에 색깔별로 볼펜을 가득 채워서 다니곤 한다. 보부상. 가방에 물건을 잔뜩 챙겨나오는 사람들에겐 혹시몰라병이 있다고 말하던데. 보부상에 필통까지 가득채워 다니는 나에겐 분명히 그런 병이 있다.
색깔 펜에 대해 이야기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때 나는 학교 교문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이나 음식점을 나가는 것도 무서워하는 엄청난 겁쟁이였다. 그러다 보니 일과 시간에 지각, 조퇴는 물론이고 야자도 빼는 일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감정적이고 기분파였다. 그랬던 나라서 그날 공부하던 그 과목에, 쓰기로 정해놓은, 그 색의 형광펜이 나오지 않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버려 형광펜을 사러 가야겠다며 담임 선생님께 야자를 빼달라고 했다. 내가 다니던 그때 나의 학교는 야자를 신청 받은 몇 명만 하는 분위기가 되어 야자 시간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5-6명 정도 뿐이었다. 거기다 매일 빠지지 않는 사람은 정말 나를 포함해 2-3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같이 남아있던 내가 야자를 빼달라고 하니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래 한번 쯤은 그럴 수 있지 싶은 생각을 하신 것인지 별 말도 없이 허락해주셨다. 그렇게 야자를 빼고 형광펜을 사러갔던 기억이 있다. 가까운 최근에도 형광펜이 다 떨어져 공부하기 싫었던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는데.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때 야자를 뺐던 그 형광펜과 같은 것이었다, 그 형광펜이 유난히 빨리 닳는 것 같기도? 여전히 빨리 닳는 형광펜처럼 내가 생각한 것은 꼭 그대로 해야 하는 성미,,, 그것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싫어하는 점은 잉크가 끊기는 것. 잉크가 자꾸 끊겨서 안나오는 펜을 붙잡고 긴 글을 쓰고 있자면. 펜과 나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감정을 느낀다. 나왔다 안나왔다. 안나오면 나올 때까지 다른 종이에 휘휘, 빙글빙글 펜을 굴렸다가 다시 글자를 쓴다. 그런데 내가 글자를 쓰는 순간 다시 또 잉크는 나오지 않고. 나올 잉크가 다 닳은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새로 사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펜으로 바꾸는 것도 싫어서. 나는 잉크가 끊기는 펜과 끝까지 싸워 가며 글을 쓴다. 예전엔 끊기지 않는 펜을 고르는것이 운에 달렸었다. 잘 나온다고 생각한 펜이라도 잉크가 터지거나, 아니면 너무 끊기거나 하는 이슈가 많았던 것 같다. 색깔 펜이면 더 그렇고, 연한 색이면 더더욱 그랬다. 지금도 그런 편이긴 한데, 예전보다는 잉크가 끊기지 않는 펜을 많이 찾게 되어서 필기하는 삶의 질이 너무 좋아졌다. 많은 펜을 써보다가 결국 잘 나오는 펜을 찾게 된 것인지, 그 사이에 기술력이 향상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가지를 하면 끝까지 해내야 하는 성격. 끝까지 이겨야 하는 성격. 예상치 못한 이슈를 싫어하는 성격. 펜 하나로 몇 가지 성격을 만난다. 필사하는 일은 흐름이 끊기지 않게 집중해서 하는 일이라 내제된 성격을 많이 만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에 예민함이 발동되는 성격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아무 펜이나 주워서 쓰는 무던한 사람이고 싶은데. 그게 정말 쉽지가 안다.
긴 글을 쓰다보면 몰입의 순간을 만난다. 글에 빠져 들어서 문장들을 음미하는 시간은 뭔가 다른 세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꼭 필사가 아니라도 깊은 집중의 순간을 만나는 것은 짜릿한 순간이다. 나는 가끔은 그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 몰입할 수 있는 취미들을 더 만들어 낸다. 그리고 필사는 오래 이어져온 나의 집중의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더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해선 마음에 드는 펜을 찾는 일은 필요한 일.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될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 나의 성격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