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버전 팔만대장경

by 윤슬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왔던 것 같다. 팔만대장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약 8만장에 이르는 불교 경전의 목판 인쇄본이다. 이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첫번째 대장경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지고, 계속되는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다시 국가적 사업으로 제작된 것이 이 팔만대장경이다. 그러니까 고려시대에는 외부의 침입에 흔들리는 나라를 굳게 세우기 위해 목판에 부처의 말씀을 한자한자 새겼던 것이다.


불교 경전을 집대성해 부처의 가르침과, 승려자들이 지켜야할 계율과, 그것들을 해석하고 분석한 글들을 담았던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누군가는 전쟁에 나가 무력으로 싸워야겠고, 누군가는 나라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힘든 상황을 살아야 하는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했던 것이다. 무력 충돌만이 전쟁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이 전쟁의 과정이고. 그래서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그런 일. 싸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피하고 싶지만 외부의 충돌로 인해 피할 수 없을 때. 그럴 때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자면 그 답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나오는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속절없이 싸움에 휘말려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는 일.


외부의 자극에 취약한 내가 주로 취하는 방법도 바로 팔만대장경에 담긴 그것과 닮아있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온통 예상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군가 싸움을 걸지 않아도 항상 긴장 상태. 언제라도 전투에 참여 할 수 있는 대기 모드로 살아간다. 그런 긴장 가득한 상태로 살아가는 일은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상태가 오히려 싸움을 방지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싸움 대기 모드라고 해서 싸우려고 들지는 않는다.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그가 원하는게 부적절하지만 않다면 어느정도 내어주는 방식으로. 팽팽한 관계의 선을 조금 느슨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피할 수 있는 싸움은 굳이 나서서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싸우자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대놓고 싸우겠다고 나서는 이에게는 싸워주는 수 밖에는 없으니까… 싸우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싸워야 하는 싸움을 피하는 법을 찾고 싶지는 않아서 언제든 싸움에 응하겠다는 자세를 장착하고 있는 것이다.


집 바깥의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치고는 그렇게 싸움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기는 하다. 그 이유는 할거면 제대로 해야한다는 성격 탓인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모를 전투를 항상 준비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유야 어쨌든 크고 작은 싸움들은 언제나 마음에 일정 부분 생채기를 낸다. 어떤 상처도 나지 않아서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촉즉발의 전시 상황의 전후의 출렁이는 감정. 누군가 보기에 평소와 다름 없어 보인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전투 상황에 처하면 그러한 감정의 격동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느끼기 싫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을 피해버리는 것은 지는 일보다도 싫다. 지금 회피해봤자 그 일은 언제든, 어떻게든 마주보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싸움을 피하는 대신 잘싸우기 위해서, 싸우는 과정을 잘 견뎌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마음을 단련한다. 고려가 거란과 몽골의 침입 상황에서 불경을 새기며 마음을 다스린 것과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나는 필사를 통해서 마음을 단련한다. 글을 쓰는 일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된다. 필사도 나의 마음을 알아가는 창구가 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을 쓰는 글과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따라써보는 일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런 이해하는 마음은 그 사람과 나의 마음이 소통되지 않아 꽉 막혀 있는 감정의 길을 이어준다. 이해는 공감과는 다르다. 내가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거나, 그렇게 행동할 것 같지는 않아도. 그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 왜 그랬는지를 이해하다보면 그냥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와 나의 상황은 다르니까. 나는 희미한 희망일지라도 기대를 걸어보는 사람이지만. 너는 확실하고 단단한 땅을 딛고 싶을 수도 있는거니까. 한자한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써내려가면서 나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의 과정을 읽어가는 법을 배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며.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마음을 이성과 감정이 적절히 조화된 생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마음들이 해결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상대의 침입으로부터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그들이 하는 말들을 잘 분별해내는 것. 크게 흔들리며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한치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유지할 것인지.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내가 정말 바라는 것만을 골라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나 역시 어떤 선택이 내게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어서 생각을 수용하는 일 앞에서 고민하는 날이 많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선택과 고민은 살아가는 내내 함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 앞에서 나의 결론은 더 많이 알고 배우자는 것이다. 문득 돌아보다보면 전보다 더 나라는 사람으로 굳어진 내가 보인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수 많은 텍스트와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동안 열심히 일궈온 나의 모습이 나는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나의 모양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으로 빚어지고 있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더 나은 나를 위해. 새로운 깨달음을 위해. 더 많은 생각을 읽고, 쓰고, 배우기로 한다. 내가 배워온 모든 것들이 나를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정말 믿을 것이 그것밖에는 없으니까.


나의 필사는 지금껏 내내 타인을 이해해가는 과정이었고, 흔들리지 않기 위한 준비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언제나 전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아왔었나보다. 그리고 그 결론은 여기에 다다랐다.


부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글을 목판에 새기던 고려.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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