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힘

by 오후 네 시


토론토의 겨울은 눈이 많지만 해가 나는 날도 꽤 있어서 그럭저럭 견딜만한 편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눈 대신에 비가 잦고 해가 나지 않는 흐린 날이 계속됩니다. 이제 곧 열 살이 되는 딸아이에게 꼭 비타민 D를 챙겨 먹으라고 아침마다 잔소리를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천성이 낙천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무식하게 용감하기도 합니다. 미리 꼼꼼히 계획을 하고 단계별로 절차를 밟아가면서 계획을 실천하는 일은 제 천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의 일을 시작하게 되면 저절로 계획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세워집니다. 그리고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요. 그렇게 대충 머리에 떠오른 계획에 의지해 하나씩 하나씩 장애물을 넘어가며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분을 느끼며 일을 처리하곤 합니다. 임상 수의사를 하면서 그나마 계획부터 수립하는 일에 좀 길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환자 개개인의 히스토리를 잘 듣고 신체검사를 꼼꼼히 한 뒤 문제점을 파악해 진단과 치료법을 정리해서 단계별로 밟아 나가는 동시에 환자 보호자를 이해시키고 설명하거나 혹은 설득해 환자와 그 보호자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을 유도하는 일은 적절한 계획을 세우는 능력과, 경험에서 비롯된 순발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합니다.


수의사라는 직업은 고단함을 느끼는 순간이 더 많은 직업입니다. 진료와 치료에 있어서 내가 보는 모든 진료의 책임을 두 어깨에 지고 있기 때문에 한 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되는 그런 직업입니다. 같이 일하는 간호사나 보조들의 실수조차 결국엔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실수를 하나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일일이 세세하게 감시 감독하며 잔소리를 하는 일은 제 성격에도 맞지 않고 결국엔 건강하지 않은 일터 환경을 조성하기에 늘 칭찬하고 격려하고 또 같이 잘 화합해서 인내심을 갖고 일해야 합니다. 환자 보호자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진료실에 들어와서 부부싸움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이 같이 사는 동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 꼼꼼하게 모든 것을 컨트롤하려 해서 피곤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연차가 낮을 때는 사람들로 인해 피로를 많이 느꼈습니다.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적은 수술방을 더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에 대한 대처 능력이 비교적 좋은 유연한 수의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자신의 한 부분을 죽이거나 마비시키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번아웃을 겪기도 했고 다 집어던지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울며 마음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힘들었던 날에는 부엌에 서서 요리에 열중합니다. 특히 보호자들을 울린 날 마음이 힘듭니다. 엊그제 열네 살 된 고양이의 배를 촉진하다 야구공만 한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진료실에는 항상 크리넥스 박스가 놓여 있습니다. 안 좋은 소식을 전했을 때나 안락사 시, 보호자가 눈물을 터뜨릴 것을 대비해서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여자 보호자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피검사 뇨검사부터 해 보고 내과 전문의에게 리퍼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그 고양이의 검사 결과지부터 찾아봤는데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종양이 무엇이든 간에 신장과 간에 침습되었을 것 같은 그런 피검사 뇨검사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런 소식을 전하기 전엔 늘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합니다. 보호자는 단단한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침착하게 결과를 듣더니 선생님 그래도 뭐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습니다 하고 리퍼를 부탁했습니다. 점심시간도 제쳐 두고 열심히 리퍼럴 레터를 써서 전문의에게 보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얼마 전 이태리 요리 전문 셰프에게서 배웠던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세몰리나 밀을 물과 소금을 넣고 반죽해 일일이 잘라 포크로 모양을 내어 뇨끼를 만들어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삶습니다. 세몰리나 밀은 살짝 입자가 굵고 거친감이 있고 노란색을 띠고 있습니다. 반죽을 resting 하는 동안 간단하게 파스타 소스를 만듭니다. 가지를 얇게 잘라 소금으로 절인 후 물기를 잘 닦아 살짝 올리브 오일에 튀겨 둡니다 우선. 그리고는 같은 팬에 남은 오일을 두 세 스푼 정도만 남긴 후 약불에 저민 마늘 서 너톨을 넣고 향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는 커다란 토마토 두 개를 대충 깍둑 썰어 팬에 넣고 7~8 분 중 약불에 익힙니다. 집에서 반죽해 만든 뇨끼를 끓는 물에 익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뇨끼가 수면 위로 동동 떠오르면 대충 국자로 건저 파스타 소스를 만들고 있던 팬에 넣어 줍니다. 뇨끼 삶은 물도 조금 들어갑니다. 뇨끼에서 나온 전분이 들어간 물이라 소스를 걸쭉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적당히 뇨끼에 소스가 배어 드는 것이 보이면 불을 끄고 신선한 바질과 리코타 치즈를 얹고 후추를 갈아 식탁에 올립니다. 가지 튀김은 사진에서처럼 군데군데 장식처럼 넣어 줍니다.


이렇게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하면 옆지기도 딸아이도 슬그머니 다가와 반죽을 자르고 밀어 귀여운 방석 모양으로 톡톡톡 끓어 잘라 포크로 모양내는 것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 내 마음에는 따스한 무언가가 차 오릅니다. 아, 오늘 하루도 나는 잘 살아내었구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우울감이나 일에서 느낀 피로감을 이겨내고는 다시 힘을 얻어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June입니다. 온몸이 새하얀 상냥하고 수줍음이 많은 고양이입니다. 그 아이는 아마 오늘 내과의를 만나 복부초음파 검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검사 결과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상 수의사가 되고 나서는 매일 밤 이렇게 아픈 환자들을 한 번씩 떠올리고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기도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파스타의 이름은 Cavati Alla Norma입니다. 시실리의 유명한 파스타입니다. 시실리 출신 작곡가 빈센조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서 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시실리 음식과 와인을 좋아합니다. 별다른 기교 없이 재료 그대로의 맛을 즐기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음식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파스타에 쓰는 뇨끼의 이름이 까바띠인데 밀가루 반죽을 잘라 길게 늘여 대충 똑똑똑 손톱크기로 잘라 포크나 손가락 끝으로 바닥에 대고 살짝 힘을 주고 밀어 올리면 동그랗게 말려 들어간 모양이 됩니다. 여기에 쓰이는 리코타 치즈는 salted Ricotta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샐러드에 넣어 먹거나 하는 부드러운 리코타보다는 강도가 있고 쫀득함이 좀 있습니다.


매주 제 스스로에게 허용한 얼마 간의 용돈을 아껴 두었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셰프들이 본인 집이나 스튜디오에서 여는 요리교실에 참가하곤 합니다. 일과 집만 오가는 삶에서 벗어나 낯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사랑하는 반짝반짝한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수업을 듣고 돌아오면 또 한동안 열심히 잘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살아갈 궁리를 열심히 떠올리지 않으면 내 마음은 금방 가라앉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도 만나기 싫은 그 우울의 방으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소중한 딸아이의 잠든 얼굴을 어루만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산책을 하거나 귀엽고 예쁜 개들을 산책시키거나 짐에 가서 무게를 들며 땀을 흘리거나 해도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나의 빈구석을 채워주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은 요리를 하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글로 풀어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내일은 토요일입니다. 조금 마음이 설렙니다. 파머스 마켓에 가서 신선한 채소와 커다랗고 신선한 달걀을 사 와서 요리할 생각에서 입니다.


모두에게 평안하고 좋은 주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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