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 선생님, 선생님의 빠른 답장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읽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의 가지들이 순식간에 자라나 금세 숲을 이루었답니다. 얼른 또 편지를 써야지 생각했지만, 재빨리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왜냐하면 때는 바야흐로 3월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12월에는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들과 평가 업무들이 한가득이라 무척 바쁘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17년 교직 경험에 의하면 3월은 12월보다도 더 혹독한 시절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사로서 어느 때가 중요하지 않고 힘들지 않은 시기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가운데 단연코 ‘전쟁 같은 사랑’이 휘몰아치는 때가 바로 3월 아니겠습니까? 부부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고 하지만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궁합이 존재한다는 걸 경력이 늘어 갈수록 체감하게 됩니다. 3월은 바로 그 궁합을 서로 맞추어가는 정말 중요한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 관계가 잘못 어긋나기 시작하면 1년 농사(교육활동)를 다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5년 전에 한 학부모님과 3월 첫날 이런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긴 방학이 끝나고 이제 전쟁터가 가정에서 학교로 바뀌었네요. 선생님, 부디 전쟁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아이고, 어머님!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전리품만 가득한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가지들을 다듬고 다듬으며 3월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사이 저는 아내와 딸아이가 있는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 들어왔습니다. 캐나다에서 한국 뉴스를 검색해 보니 한국은 지금 벚꽃 없는 벚꽃 축제가 이슈가 되어 뉴스에 등장하는 걸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앙꼬 없는 찐빵’, ‘고무줄 없는 팬티’ 같은 말놀이가 번뜩 스쳐 잠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힘겹게 3월을 버티고 계실 선생님들이 떠올라 마음이 푹 가라앉았습니다.
한국의 선생님들은 ‘교권 없는 교사’로서 허허벌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와 같이 힘이 없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이제 한국의 교사들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저는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답장에서 이른 퇴근 시간 때문에 학교 밖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교사들의 숨겨진 현실을 이야기하셨지요. 어디 우리 교사들이 받는 눈총이 그뿐이겠습니까?
저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인사를 지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젠 학교를 방문하는 학부모님들께서 복도에서 마주치는 교사들에게 눈빛 한 번 주지 않고 지나가는 광경이 일상이 되었어요. 물론 학교 안에는 교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차한 군더더기 말이 될 듯하여 줄이겠습니다)
제 교직 경험으로 교사는 절대 부모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교사가 아무리 올바른 가치를 이야기해도 가정에서 부모님께서 다른 이야기를 하시면 교사의 가르침은 모래성이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자신의 부모님도 존중하지 않는 교사들을 아이들이라고 존중할 리 만무한데 인사 지도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도대체 교사들은 왜 이렇게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요?
물론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지난번 제가 드렸던 편지의 내용대로 이번에는 교사들의 과도한 행정업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년 서이초 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언론에서 ‘교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권에 대한 분분했던 의견들 사이로 교사로서 인간 존엄을 무시당하는 사연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게 분분했던 ‘교권’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교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개념적 정의에는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거로 생각합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사회가 합의한 올바른 가치,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 지구적 존재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학들을 가르치는 존재가 바로 교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교사들은 그 분명한 가르침의 행위에 집중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존재적 아이러니에 허우적대는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존감을 부정당하는 그 배경에는 교사들이 흔히 잡무라고 말하는 과도한 행정업무가 있습니다.
만일 교사들의 잡무와 관련된 어처구니없는 사연 말하기 대회를 4년마다 개최한다면 월드컵 축구 경기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교육은 전 국민, 아니 전 세계인 모두가 깊이 관련된 삶의 영역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자꾸 문제에 대해 떠들어대고 다양한 의견들이 교환되어야 건설적인 해결 방법이 나올 텐데, 우리 교직 사회는 너무나도 경직되어 있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현실에 속이 터집니다.
솔직히 B급 문화 현상이 존재하지 못하는 영역이 교직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모든 대한민국 공직 사회가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교육계는 더 심한 듯해요. 교육은 미래의 새싹을 키우는 숭고한 일이기에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운 영역이 되어버린 듯해요. 나중에 선생님과 함께 교직을 바라보는 이러한 성직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사들에게도 억눌린 감정들을 시원하게 내뱉을 해방구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근 선생님과 제가 주고받는 편지 쓰기를 모든 교사들의 펜팔 운동으로 확산시키고, 그 사연들을 공유해 주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는 실없는 상상도 해보았답니다. 하지만 감히 사대부의 나라(?)에서 어디 그런 천한 언사들을 공공연하게 퍼트릴 수 있겠습니까……
각설하고, 현장 교사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영된 행정업무의 대대적 개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발령을 받고 3년이 흘렀을까요, 아마 2010년으로 기억해요. 교원능력개발평가를 본격 도입하기 위해 시범 운영을 한 후 방학이 되자 교육청 장학사들이 현장 컨설팅을 한다고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학이니 당연히 부장 선생님들처럼 업무를 과하게 짊어지고 계시는 분들만 계셨지요. 저는 당직 근무자로 출근 상태였고요. 물론 지금은 전교조의 단체협약으로 방학 중 교사의 일직성 근무가 폐지되었지만요.
저는 얼떨결에 교장실로 올라가 장학사와 함께 교원평가 시범 운영에 관한 의견을 나눌 기회가 생겼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교원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 평가가 도입되기 위해서는 설문 방식에 섬세한 제한 사항들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저는 시골 면 단위 작은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읍내에 있는 큰 학교에서는 교원평가를 시행하기 전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크게 한턱을 내는 분위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경악했거든요.
그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교원평가를 볼모로 협박성 민원을 제기한다는 뒷말이 무성하니 장학사에게 교원평가 도입 시기를 늦추거나 시행 방식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장학사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부분의 학교 현장에서는 아주 건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해박한 교육학 지식으로 신규 교사였던 저를 가르치기 시작했죠.
감히 햇병아리가 천한 시정잡배들의 일탈을 논했던 걸까요?
하지만 지금 교원평가 상황이 어떻습니까?
학부모들이 무분별하게 적어내는 인격 모독적인 항의성 설문 내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교사들이 늘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현장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선군(善君)을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에나 만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고 아예 변화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도 더뎌서 돌려버린 교사들의 벼랑 같은 등이 너무나도 차갑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도 고경력(?) 교사가 되어 비로소 제 뜻을 펼칠 기회가 찾아왔더랍니다. 제가 근무하는 충남지역에도 이른바 혁신학교가 만들어졌고, 뜻을 함께하는 훌륭한 선생님들과 뼈를 갈아 넣으며 공교육 정상화 모델 만들기에 몰입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참 많이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꿈을 꾸면 다음 날 현실이 될 수 있었던, 교사들의 승진 점수 채우기를 위한 실적 쌓기가 아니라 진짜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활동에 온전히 시간과 노력을 다할 수 있었던 시절이 제게도 주어졌던 것입니다.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마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교사들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던 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업무전담팀에 관한 것으로 행정업무였습니다.
노근 선생님께서도 아시듯이 현재 교원업무 정상화란 이름 아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전담팀을 만들어 과도한 행정업무로부터 교사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그 과정을 경험해 보니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이 아니었어요. 교사들은 직접적인 교육활동과 관련된 업무들만 가져가고, 교육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부차적인 모든 업무들을 전담팀에서 해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기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해요. 하나는 혁신학교에 1명씩 배정되었던(충남지역의 경우) 교무업무전담사를 모든 학교에 2~3명씩 고용·배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전담팀을 총괄하는 업무를 교사가 아니라 관리자에게 법적 의무를 부여하여 맡기는 것입니다.
교무업무전담사 제도 확대는 교육부 예산의 효율적 재배치를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로 자존감을 잃어가는 여성들에게 재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들과 행정실 직원들과의 대승적인 업무 재조정을 통해 학교 행정업무 방식을 통합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사들과 행정실 직원들 사이에 발생하는 업무 영역에 관한 갈등도 상당한 게 현실이니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행정실장님과 언성을 높이며 논쟁을 벌이지 않은 해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어느 해는 학교 내 설치된 CCTV 관리가 어떻게 교사 업무냐고 소리쳤고, 어느 해는 학교 내 컴퓨터 기기 관리를 왜 교사가 해야 하냐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교무업무전담팀 총괄 업무를 관리자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답장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신 기득권 카르텔, 어쩌면 우리의 승진제도 역시 그 카르텔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잡무들과 상급 기관의 지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여 얻는 승진 점수로 관리자 성전에 입성하신 분들은 어쩌면 하나 같이 과거 교사였던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는지요. 10여 년 전에 매년 직업 만족도를 조사해 발표했던 모 언론기관의 자료를 보면 단연코 1등이 초등학교 교장이었습니다. (그냥 교장이 아니라 꼭 찍어서 초등학교!) 진실로 진실로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우리의 교장·교감 선생님들께서 누리기만 하는 모습을 버리고 교사들이 온전히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로 환골탈태할 수는 없을까요?
교장·교감 선생님의 학교 업무 지원은 비단 행정업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서이초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된 수업 방해 학생의 분리 지도 및 개선되어야 할 학부모 민원 대응 시스템에서도 그분들께서 역량과 지혜를 나눠주셔야만 한국의 교육이, 대한민국의 학교가 정상화될 거라 확신합니다.
제발 교사들에게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세요!
그런 다음에 우리 교사들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제재를 가한다면,
정말 한 마디도 토 달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아니 수십 번 수백 번을 고쳐 생각해 봐도 교장·교감 선생님께서 만일 서이초등학교 신규 선생님의 민원 대응을 지원해 주셨다면, 과연 그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아, 또 억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최근에 들었던 학교와 관련된 기막힌 두 단어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개근 거지’이고, 다른 하나는 ‘민원 연구학교’입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도 들어보셨는지요?
‘개근 거지’는 부모님의 경제력이 낮아서 가정체험학습을 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개근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민원 연구학교’는 반대로 경제력이 있는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만을 위한 특별한 생활지도를 요구하는 민원으로 가득한 학교를 가리키는 말이고요.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양극화를 체감하는 단어들이라 또 한참 동안 쓴 입맛을 다셔야만 했습니다.
3월을 다 보내신 노근 선생님의 학교는 어떠신지요. 여러 뜨거운 민원으로 열꽃이 피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래도 프랑스 교육 탐방을 다녀오면서 가슴에 품었던 그 아름다운 유럽 문화를 떠올리며 힘을 내시길 바라며, 겨울을 이긴 봄꽃처럼 찬란하게 피어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온전히 교사일 수 있는 봄흙 같은 존재들이니까요.